제4화
창문이 내려오자 하시훈의 정교한 얼굴이 보였다. 앞으로 다가간 설인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안 가고... 기다린 거예요?”
하시훈이 차에서 내리더니 설인아를 도와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설인아는 누군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녀를 도운 게 언젠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고마워요.”
설인아는 고개를 숙인 채 눈시울을 붉히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하시훈은 빨갛게 무어오른 설인아의 얼굴을 보며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누가 그런 거야.”
설인아는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올라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 괜찮아요.”
하시훈이 무서운 살기를 뿜어내며 설씨 가문 별장으로 들어가려는데 화들짝 놀란 설인아가 얼른 팔을 잡아당겼다.
“지훈 씨, 안 돼요...”
“내 사람을 건드렸다는 것 죽겠다는 건데.”
온도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에 설인아가 온몸을 파르르 떨더니 이내 팔을 꼭 붙들고 애원했다.
“나 피곤해요. 일단... 일단 돌아가서 얘기해요.”
맞아서 빨갛게 부어올랐던 얼굴이 두려움에 하얘지기 시작했다. 하시훈이 시선을 돌리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는 내내 차 안은 정적이 흘렀고 한 시간 후 강수별장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거실에 늘어선 채 공손하게 인사했다.
“도련님, 사모님.”
당황한 설인아가 자기도 모르게 하시훈을 바라봤다. 이미 집에 다 얘기했을 줄은 몰랐다.
하시훈이 설인아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이 사람들에게 시켜. 대외적으로는 비밀 지킬 거야.”
이 말에 마음이 따듯해진 설인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하시훈이 하인들에게 물러가라고 하고는 설인아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설인아는 약상자를 꺼내 오는 하시훈을 보며 살짝 당황했다.
“지훈 씨...”
“일단 부기부터 빼자.”
순간 설인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자가 직접 약을 발라주겠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까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 봐.”
하시훈이 이렇게 말하며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차가운 연고가 얼굴에 닿자 정신을 차린 설인아가 얼른 하시훈 손에 든 연고를 받아오려 했다.
“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움직이지 마.”
거절할 틈을 주지 않는 하시훈을 보며 설인아는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거리가 어찌나 가까운지 설인아는 하시훈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를 그대로 맡았고 너무 긴장해 심장이 벌렁대기 시작했다.
하시훈은 점점 빨개지는 설인아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설형우가 때린 거야?”
설인아가 입술을 앙다물더니 대답 대신 웃었다. 처량한 눈빛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 말이 맞음을 알려줬다.
하시훈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왜 때린 거야?”
설인아가 잠깐 망설이더니 가볍게 말했다.
“어차피 이제 쫓겨나서 원인은 중요하지 않아요.”
“쫓겨났다고?”
하시훈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설인아의 턱을 살포시 들어 올리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앞으로 여기서 너를 쫓아낼 사람은 없을 거야.”
설인아가 잠시 넋을 잃고 멍한 표정으로 하시훈을 바라봤다. 그 말에 대답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시훈은 설인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손을 놓더니 약상자를 닫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너는 이제 나 하시훈의 여자야. 그러니까 너한테 손대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용서가 안 돼. 어디 감히 내 머리 위로 기어오를 생각을 해.”
‘내 여자라고?’
설인아의 가슴이 요동쳤다.
하시훈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너는 내가 네 남편이라는 것만 기억해. 나는 이름만 남편인 게 아니야.”
이 말에 설인아의 심장이 철렁했다.
‘서... 설마 지금...’
“설인아. 시간은 줄게.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
하시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설인아는 하시훈이 떠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누군가 문을 두드려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쉰 살 남짓 되는 여자가 서 있었는데 심플한 가정복 차림을 하고 설인아를 자애롭게 바라봤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곳에서 집사로 일하고 있는 유명자라고 합니다.”
유명자는 설인아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씨 가문에서 10년 이상 일했는데 도우미 중에서도 지위가 매우 높았다. 신혼집을 금방 마련한 걸로 아는데 아마도 하시훈이 특별히 본가에서 데려온 것 같았다.
설인아가 얼른 한쪽으로 비켜서며 인사했다.
“집사님, 안녕하세요.”
유명자가 활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와 설인아를 아래위로 훑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도련님 안목이 높으세요.”
이 말에 설인아가 얼굴을 붉히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마른기침했다. 그런 설인아를 보며 유명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죄송해요. 도련님이 말씀해 주실 수 있는 부분은 다 말씀해 주셨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설인아가 황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집사님.”
“도련님 성격이 좀 무뚝뚝해서 말이 적어요. 여자를 가까이하는 거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가시기 전에 특별히 사모님과 얘기 좀 나눠보라고 하더라고요.”
“도련님이 사모님을 매우 신경 쓰시는 것 같아요.”
설인아는 하시훈이 ‘내 여자’라고 했던 게 떠올라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갔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유명자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급한 일이 있어서 한 주간 출장을 나간 것뿐이지 사모님 곁에 있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알아요.”
설인아는 유명자가 그녀를 따지기 좋아하는 여자라고 생각할까 봐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따지려는 건 아니에요. 일이 중요하죠.”
요즘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설인아도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하시훈이 마침 자리를 비워줬다.
...
설인아는 강수 별장에서 지내면서 의외로 편안함을 느꼈다. 의식주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거니와 유명자가 가끔 찾아와 얘기를 나눠줬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 설인아는 이제 지난날은 훌훌 털고 해야 할 일을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설인아는 간단히 준비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아침을 먹은 뒤 집을 나섰다. 지금 몰고 있는 차가 하시훈의 차라 설인아는 사실 마음이 착잡했다. 모든 걸 다 생각하고 준비한 하시훈을 떠올리며 설인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출근 시간이 아니었기에 길에는 차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안심한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설인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 앞차와 심하게 부딪힌 것이다.
‘아침부터 이렇게 재수가 없다고?’
설인아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앞차 운전기사가 설인아를 보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또 여자네? 운전이 미숙하면 집에서 애나 보든지. 킬러가 따로 없네.”
설인아의 표정도 싸늘하게 식었다.
“킬러에 남자, 여자가 어디 있어요? 게다가 급브레이크를 밟은 사람은 그쪽이잖아요.”
“앞에 구덩이가 있는데 그러면 브레이크를 밟지 엑셀을 밟아요? 안전거리 유지 몰라요?”
예의라는 건 밥 말아먹은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설인아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뒷좌석에 앉은 남자가 차창을 조금 내리고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승철아, 시간 없다. 빨리 처리해.”
깜짝 놀란 설인아가 자기도 모르게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틈이 너무 작아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설인아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육진수임을 알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