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설연우의 웃음소리는 특히나 날카롭게 들렸다.
그녀의 표정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을지 상상이 간 설인아는 전화를 끊으려던 마음을 접고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너 말이야, 육진수가 네 이 모습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얼굴이 굳어진 설연우는 이내 손에 들고 있던 반지를 탁자 위에 내리치며 화가 난 듯 소리쳤다.
“설인아, 네가 말한다고 진수 오빠가 믿을 거 같아? 명심해...”
“흥, 내가 녹음 안 했을 것 같아?”
“너... 설인아, 진수 오빠에게 보내면 아빠더러 평생 너 같은 딸을 인정하지 말라고 할 거야.”
당황한 기색이 다분히 묻어나는 설연우의 목소리를 들은 설인아는 냉소를 내뱉으며 운전을 했다.
“벌써 꼬리를 내리네? 싸움도 못 하는 게.”
“너...”
설인아에게 자신의 감정이 휘둘린 것을 깨달은 설연우는 숨을 고르며 분노를 가라앉혔다.
‘설인아가 녹음할 리가 없어. 설령 녹음해서 진수 오빠에게 보낸다 해도 진수 오빠는 절대 믿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진수 오빠는 설인아가 이간질한 것을 극도로 혐오하니까. 설인아가 파일을 보낸다고 해도 진수 오빠는 오히려 설인아가 나를 모함하려는 걸로 오해할 거야.’
여기까지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 설연우는 이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넌 그냥 입만 살았구나. 네가 청난을 사칭한 게 알려지면 과연 어떻게 될까?”
설연우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꽉 쥐었다. 비록 조롱을 섞은 말이었지만 자세히 들으면 약간 떠보는 뉘앙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설연우의 머릿속에 설인아는 그토록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설인아가 진짜 청난이라면 그녀는 다른 준비를 해야 했다.
설연우의 하찮은 술수를 바로 알아챈 설인아는 순간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설연우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면 그녀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한 설인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내가 청난을 사칭한 게 너와 무슨 상관인데?”
설연우는 순간 기쁨이 차올랐다.
‘역시.’
다행히 통화를 녹음하고 있었고 방금 그 말을 정확히 녹음했다.
설연우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믿기지 않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언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렇게 사람을 속이면 안 돼.”
얼굴은 흥분과 만족으로 가득했지만 목소리는 가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면 너 때문에 도련님의 병이 더 악화될 거고 아빠와 진수 오빠의 체면도 구겨질 거야.”
설연우의 연기를 듣고 있는 설인아는 재미있는 듯 핸들을 잡은 손가락을 탁탁 두드리며 맞장구를 쳤다.
“난 망신당해도 상관없어. 다른 사람이 망신당하는 걸 내가 왜 신경 써?”
원하는 대답을 들은 설연우는 눈빛을 반짝이더니 일부러 설득하는 척하며 말했다.
“언니 얼른 지 회장님께 사과해. 욕심을 버려.”
설연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빠에게 얘기해서 언니를 설득하라고 할 거야.”
말을 마친 설연우는 설인아를 비웃을 시간이 없었기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지금 당장 진수 오빠에게 이 녹음을 들려주고 싶은 설연우는 악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혼자 말했다.
“이년, 이번에는 어떻게 벗어날지 보자.”
이 증거만 있으면 설인아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을 것이다.
...
한편, 설인아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사라졌고 조금 전보다 진지해졌다.
설연우는 그녀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래도 자매인데... 설연우는...
하...
예나 지금이나 설연우에게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 설연우가 어떻게 놀아나는지 지켜볼 것이다.
소란을 피우기 좋아하니 얼마나 더 큰 소란을 피우지 지켜볼 것이다.
...
지씨 가문.
화려하고 깔끔했던 별장에 부서진 유리 파편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서둘러 별장에 들어선 설인아는 발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대충 둘러보기만 해도 지서훈이 발작할 때 얼마나 무서웠을지 알 수 있었다.
집안의 모든 것이 거의 다 부서져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소파 뒷벽에 주먹으로 친 흔적이 남아 있었고 움푹 들어간 부분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설인아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때 소리를 듣고 서둘러 위층에서 뛰어 내려온 양진환은 숨을 헐떡이며 설인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인아 씨, 위층으로 오시죠.”
설인아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양진환과 함께 지서훈의 침실로 향했다.
모든 곳이 부서진 흔적으로 가득한 위층도 거실보다 나을 게 없었다.
설인아는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지영수와 지서훈의 어머니 조희영은 한쪽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서훈은 침대에 묶여 있었고 방금 물에서 빠졌다가 나온 사람처럼 머리와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핏발이 선 두 눈으로 설인아를 노려보고 있는 지서훈은 입안에 무언가가 쑤셔져 있어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설인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지서훈을 진찰하려 할 때 조희영이 그녀의 앞을 막더니 분노에 찬 얼굴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네가 재발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 아들이 왜 다시 이러는 건데!”
지영수는 굳은 얼굴로 조희영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여보, 그만해. 일단 신의가 진찰하게 해줘.”
잔뜩 분노하고 있던 조희영은 이내 눈물을 흘리더니 지영수의 손을 힘껏 뿌리치며 울부짖었다.
“신의는 무슨 신의? 이 여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침대 위에서 몸부림치는 지서훈을 바라보는 설인아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시간을 지체하면 지서훈의 혈관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설인아는 조희영을 바라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요.”
앞으로 나아가 조희영을 밀어내려 할 때 지영수가 그녀보다 한발 앞서 조희영을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그만해. 시간 끌지 말고 나가.”
지영수가 잡고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조희영은 분노만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조희영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설인아는 얼른 지서훈의 침대 옆으로 다가가 주머니에서 은침을 꺼냈다.
설인아는 혈점을 찾아 은침을 정확하고 빠르게 꽂은 뒤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조심하라고 한 걸 지키지 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