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문숙이 설연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육진수가 인아를 신경 쓰는 건 청난이라는 신분 때문이야.”
“나도 알아... 하지만 설인아는 이미 그 신분을 갖고 있고 진수 오빠도 알게 됐어... 엄마, 나 너무 불안해! 진수 오빠를 내 남자로 만드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두려움에 사로잡힌 설연우가 온몸을 떨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자 나문숙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설인아가 죽으면 문제가 해결될 거야.”
설연우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문숙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야...”
일어나 벽 쪽으로 걸어간 나문숙은 과일 접시에서 포도 한 알을 집어 들더니 한 손으로 힘껏 포도를 쥐어짜며 말했다.
“이 포도처럼 부서지고 살점이 찢어지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설연우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하지만... 엄마, 살인은 범죄야. 만약 엄마가...”
나문숙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가 두려워? 설인아 엄마도 내가 죽였는데 설인아를 못 죽일까 봐?”
“하지만...”
설연우는 더욱 초조해졌지만 나문숙은 냉정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너희 아버지가 진짜로 너를 아낀다고 생각해? 그 사람은 냉정한 인간이야. 그렇지 않으면 설인아의 엄마를 어떻게 버릴 수 있었겠어? 죽을 때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어. 그 사람이 너에게 잘해주는 건 단지 네가 설인아보다 뛰어나기 때문이야.”
몸을 떨며 입을 연 설연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문숙의 그다음 말은 설연우의 가슴을 더욱 떨리게 했다.
“설인아가 청난이라는 걸 네 아빠마저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설인아가 이토록 잘난 딸인 것을 알면 설씨 가문에 우리 모녀의 자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설연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들키면 어떻게 해...”
손에 든 포도를 쓰레기통에 던진 나문숙은 옆에 있던 티슈를 꺼내 손가락에 묻은 포도즙을 닦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 나에게 방법이 다 있으니까. 일단 상황을 살펴보자, 병원에서 일어난 일은 아버지에게 말하지 마.”
설연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문숙은 천천히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얼굴에 있는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우리 집 집사가 지서훈 집에서 일하는 사람과 친척이라고 하니 너는 하던 대로 공주처럼 행동해. 이 일은 엄마가 처리할게.”
말을 마친 나문숙이 사용한 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자 설연우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문숙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 믿을 만한 거야?”
나문숙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이 일은 충분히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어. 연우야, 큰일을 이루려면 절대 작은 일에 구애받으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분석해야 해. 너만 냉정하면 아무도 너를 넘어설 수 없어. 알겠지?”
설연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 말이 맞다. 냉정해야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고개를 든 설연우는 나문숙의 손을 잡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엄마 딸의 행복은 엄마 손에 달렸어.”
나문숙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내 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
악의에 찬 눈빛으로 천천히 미소를 지은 설연우는 눈빛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설인아!
너는 절대 나를 넘을 수 없어!
...
2일 후.
제성 교외의 지씨 가문 별장.
고요한 밤, 정교한 정원에 벌레 소리만 가끔 들렸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고요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별장 안.
지서훈이 침대 위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있는 그는 온몸에 힘이 들어가 근육이 튀어나왔고 피부는 비정상적으로 붉어져 있었다.
“으악!”
지서훈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거실로 향했다.
“피, 피가 필요해!”
광기 어린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 같았다.
집안의 모든 물건을 부수는 지서훈을 본 하인들은 공포에 떨며 구석에 숨었다.
집사가 떨리는 손으로 지영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도련님이 또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서훈은 눈빛이 피로 물든 채 소리를 질렀다.
“피를 내놔!”
집사는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떨어뜨렸고 겁이 많은 하인은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지서훈의 발작이 이렇게 무서운 줄 알았다면 여기서 일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을 텐데...
하인들은 지서훈의 위치를 주시하며 몸을 피했다. 그중 한 명의 하인, 유한이 구석으로 몸을 움츠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련님이 신의 청난에게 치료를 받았다고 하지 않았나요? 왜 아직도 이러시는 거죠?”
다른 사람들도 얼굴이 굳어진 채 수군거렸다.
“맞아요. 그 신의가 가짜인가 봐요.”
집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는 그날 나타난 신의, 청난이 설씨 가문의 아가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바로는 설씨 가문의 아가씨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 채 육진수를 쫓아다니기만 하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신의 청난일 리가 없었다.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 지서훈은 몸 전체가 타들어 갈 듯 고통스러웠다.
수천 마리의 개미가 가슴을 물어뜯는 듯한 느낌에 지서훈은 피가 필요했다.
피를 마셔야만 이 고통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로 물든 눈으로 구석에 숨어 있는 하인들을 본 지서훈은 이내 통제를 벗어난 듯 하인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안 돼, 안 돼!
지서훈이 주먹을 쥐고 벽장을 내리쳤다.
쾅!
지서훈은 극심한 고통으로 몸속의 광기를 억누르려 했다.
고통이 밀려오자 머리가 그나마 맑아진 그는 목소리를 낮춰 소리쳤다.
“나가! 모두 나가!”
하인들이 계속 있으면 진짜로 그들을 해칠지 모른다.
하지만 하인들은 망설이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도망친다면 도련님의 상태가 더 악화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서훈이 집사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내쫓아!”
집사는 마음을 다잡고 하인들에게 손을 저었다.
“다들 이틀 휴가를 줄 테니 나가세요.”
하인들은 마치 사면을 받은 죄수들처럼 서둘러 도망쳤다.
...
강수 별장.
침실 안, 원목 색의 가구와 깔끔한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연분홍 장미 몇 송이가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밝은 흰색 조명 아래에서 침대에 기대어 커다란 베개를 안고 있는 설인아는 고민 가득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고 쇼핑 앱을 보고 있었다.
하씨 가문의 본가에 어떤 선물을 가져가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제성의 크고 작은 쇼핑몰을 이틀 동안 돌아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선물을 찾지 못한 그녀는 정말 속이 타들어 갔다.
이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를 본 설인아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영수의 초조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신의님, 제 아들이 또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어서 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