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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은 유송아에게서 풍기는 소시민적인 티를 단번에 알아본다. 그건 아무리 애써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박민재의 어머니 정희연은 강서우를 좋아하지 않듯, 유송아 또한 달갑게 여기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강서우가 들어서는 순간 정희연의 화살은 강서우를 향하기 시작했다.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자기 남자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서 요망한 년이 집에 들어오게 만들어?” 박민재는 유송아를 등 뒤로 숨기고 차갑게 경고했다. “송아는 제 친구예요. 말조심하시죠, 아주머니.” 강서우는 문득 처음 박씨 가문의 본가에 왔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박민재는 절대 시비 붙지 말라며 신신당부했었다. 그는 본가에서 자리를 굳히지 못한 사생아 신분이었으니 아무리 억울해도 참아야 한다고 그랬다. 이제 그는 박씨 가문의 후계자로 정해져서 지키고 싶은 사람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상이 유송아라는 사실이 강서우에게는 씁쓸할 뿐이었다. 유송아는 겁먹은 듯 박민재의 손목을 꼭 잡았다. 하지만 눈빛에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마치 그가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죄송해요, 오빠. 다 저 때문이에요.” 그 말에 어떤 감정이 만족되기라도 했는지, 그는 강서우 쪽을 힐끗 돌아봤다. 하지만 거기서 마주친 건 무표정하고 창백해 보이는 강서우의 얼굴이었다. 박민재는 그녀가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상하면 말없이 굳은 표정만 짓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 세상 사람이 다 심술을 받아줘야 만족할 거야?’ “서우야, 송아랑 잠깐 있어 줘. 나 금방 갔다 올게.” 박민재는 유송아에게서 팔을 빼내고 2층 서재로 향했다. 정희연은 우아한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눈빛에는 오만함이 잔뜩 담겨 있었다. “강서우, 내가 널 얕봤어. 우리 집안에 들어오려고 이렇게까지 참고 살았네.” 강서우는 그녀와 쓸데없는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닙니다. 저는 할아버님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 말만 남기고 강서우는 곧장 부엌으로 갔다. 한 끼 식사를 만들어 주는 걸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이제 박씨 가문과는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유송아는 강서우를 따라가려다가 이내 걸음을 멈췄다. 미래 박씨 가문의 사모님으로서 굳이 하인들이 드나드는 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강서우가 세 번째 요리를 볶을 즈음, 거실에서 벼락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유송아의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깜짝 놀라 팬을 내려놓고 뛰쳐나가려는 찰나, 이미 누군가가 2층에서 한발 앞서 달려 내려와 쓰러진 유송아를 부둥켜안았다. 박민재였다. “아주머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 뒤를 이어 박민재의 아버지 박성훈도 박일성을 부축해 내려왔다. 둘 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정희연은 하얀 상자를 바닥에 거칠게 던지며 분노를 터뜨렸다. “박민재, 내가 네 친엄마는 아닐지 몰라도 엄연히 네 윗사람이야. 네가 친구라며 집에 데리고 온 아이는 나도 기꺼이 대접해 주려 했어. 그런데 이것이 나한테 짝퉁을 선물하는구나! 이 집안에서 나는 짝퉁이나 쓰는 사람이란 말이야?” 박성훈과 정희연은 정략결혼을 해서 부부간 애정이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 정희연은 딸밖에 낳지 못했다. 박성훈은 밖에서 만난 여자와 아들 박민재를 낳았다. 박민재가 운 좋게도 보성 그룹의 대표가 되어 주목받으면서 많은 재벌가 사모가 정희연이 언젠가 안주인 자리를 뺏길 거라고 비웃고는 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송아가 짝퉁 선물로 정희연을 우롱한 셈이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얼굴 한쪽이 붉게 부어오른 유송아는 겁에 질린 채 박민재의 품에 웅크리고 있었다. “오빠, 저 억울해요. 저는 오빠가 준 선물 중에서 제일 비싼 걸 골라 왔단 말이에요. 짝퉁일 리가 없어요.” 박씨 가문에 온다는 말을 듣고, 유송아는 큰마음 먹고 보석함에서 가장 아끼는 걸 골랐다. 어떻게든 환심을 사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서우는 산산이 부서진 옥팔찌를 잠시 내려다봤다. 예전에 박민재가 경매에서 식탁과 함께 낙찰받은 고가품으로, 결혼할 때 강서우에게 주겠노라며 금고에 보관해 둔 것이 떠올랐다. 결국 그게 유송아에게 넘어간 모양이었고, 지금 바닥에 떨어진 건 누가 봐도 모조품이었다. 박민재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강서우를 노려봤다. “네가 송아 보석함에 손댔지?” 강서우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유송아는 이미 눈물을 펑펑 흘리며 흐느꼈다. “제가 대학에 다닐 수 있게 도와준 것도 언니고, 민재 오빠를 소개해 준 사람도 언니예요. 저는 늘 언니한테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어요. 제 모든 걸 드려도 아깝지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제 물건을 짝퉁으로 바꿔서 곤란하게 만들 수가 있어요?” 강서우는 화가 치밀었다. “박민재, 너 진짜 내가 했다고 생각해?” 박민재는 유송아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만하자. 할아버지 기다리셔. 밥 다 됐으면 어서 차려.” 누가 봐도 유송아의 말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강서우는 씁쓸히 웃었다. “신고해. 이 정도로 비싼 팔찌면 사건으로 다룰 수 있어.” 박민재의 안색이 한층 더 나빠졌다. “서우야, 이쪽으로 와보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박일성이 직접 나섰다. 강서우는 그를 바라봤다. 지병 때문에 얼굴이 잔뜩 수척해 보이는 노인이 안쓰러워 마지못해 감정을 억누르며 그를 부축해 식탁으로 갔다. 곧 도우미들이 음식을 일제히 차렸고, 강서우가 정성껏 만든 몇 가지 반찬은 박일성의 앞에 놓였다. “역시 서우가 내 마음을 잘 알아주네. 딱 이 맛이 그리웠는데.” 한쪽은 제법 화기애애해 보였다. 그때 느닷없이 유송아가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무슨 일이든 다 제 잘못이에요. 사죄의 의미로 한 잔 올릴게요.” 그녀가 마시려 하자 박민재가 황급히 막아섰다. “의사가 술 절대 안 된다고 했잖아.” 유송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박민재를 바라봤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해서요.” 이때 박민재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강서우에게 시선을 던졌다. “사랑아, 송아 대신 네가 한 잔만 받아 줘. 그러면 이번 일 용서해 줄게.” 높은 자리에서 상황을 깔끔히 정리하는 후계자다운 태도였다. 강서우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녀는 박일성의 접시에 국을 떠 주던 집게를 내려놓고 냉담히 답했다. “나 속이 안 좋아. 못 마셔.” 박민재의 표정이 굳었다. 하루 전 강서우가 배가 아프다고 했던 얘기, 그리고 옛날부터 애써 지켜 왔던 의사의 지시 사항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유송아가 먼저 잔을 기울여 단숨에 마시고는 기침하다가 그에게 기대자, 이내 정신이 또 그쪽으로 쏠렸다. “오빠, 저는 괜찮아요. 오빠를 위해서라면 뭐든 상관없어요.” 박민재는 황급히 사람을 시켜 인삼탕을 끓이게 했고 안쓰러운 듯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강서우, 한 번쯤은 배려할 수도 있잖아.” 조금만 참으면 별 탈이 지나갈 문제였다. 하지만 강서우가 심술을 부린 탓이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박성훈이 그를 재벌가 딸과 결혼시키려 할 때도 온갖 압력을 견뎌 내며 강서우를 지켜 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게 비하면 강서우가 어느 정도 배려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냐고 말이다. 강서우는 가슴 한복판이 후벼 파이는 아픔을 느꼈다. 한때는 목숨까지 내던져 박민재의 미래를 위해 뛰어다녔건만, 지금 돌아온 건 배려를 안 한다는 말이었다. ‘내가 왜 참고 살아야 해?’ “사심으로 주인 있는 선물을 다른 사람한테 준 건 내가 아니고, 술로 사과하겠다고 일을 되풀이한 것도 내가 아니야. 넌 귀가 먹었어, 눈이 멀었어?” 박민재는 강서우가 어른들 앞에서 이렇게까지 대들 줄 예상 못 했는지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 그 순간 정희연이 콧방귀를 뀌듯 비웃었다. 그 작은 소리 하나가 박민재가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상처를 건드렸다. 한때 사생아로 세상에 알려졌을 때 겪었던 굴욕감이 다시금 밀려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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