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송아가 아직 깨어나질 않아서 내가 꼼짝할 수가 없어. 따뜻한 물 좀 마시고 괜히 트집 잡아서 날 힘들게 하지 마, 응?”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귀가 울릴 정도로 들려오는 신호음에 강서우는 눈가가 시리고도 아려 왔다.
과거에 위궤양 수술을 마치고 깨어났을 때, 박민재는 그녀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는 병상 옆에 무릎을 꿇은 채 덩치 큰 대형견처럼 머리를 강서우의 목덜미에 파묻고 쉰 목소리로 반복했다.
“사랑아, 나 너무 아팠어. 네가 수술실 안에 들어가 있는 매 순간마다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네가 내 전부인 거 알지?”
늘 강서우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던 남자가 이제는 강서우의 통증조차 귀찮은 투정 취급을 하고 있었다.
배신감이 극에 달하면 절망감마저 덤덤하게 느껴진다.
강서우는 이를 악문 채 한동안 버텼고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에서 내려올 때쯤에는 이미 정신이 아득해져 있었다. 희미한 시야 너머로 강서우는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송아야, 춥지 않아? 내 목 잡아.”
강서우는 몸을 돌려 뒤쪽을 보려 했다. 분주히 움직이는 의료진 사이로 검은 셔츠를 입은 박민재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키가 큰 그의 걸음은 상당히 빨랐다. 유송아는 어딘가에서 구해 온 회색 담요를 두른 채, 두 팔로 박민재의 목을 감싸고 그의 턱에 얼굴을 비비듯 기대 있었다.
무어라 속삭이자 박민재는 고개를 내려 그녀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정하고 애틋해 보였다.
주변은 소란스러웠지만 박민재의 눈에는 오직 유송아만 있었다.
강서우는 그가 유송아를 품에 안고 다른 차로 옮겨 타는 광경을, 익숙한 차량이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지는 순간까지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싸늘한 진료실,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뼛속까지 파고드는 서늘함이 감돌았다.
강서우는 멍한 상태로 진료를 받았고, 입안으로 밀어 넣는 위내시경 관 때문에 구역질이 쏟아지며 눈물까지 범벅이 되었다.
새벽 1시 30분이 지나서야 임시 병실로 옮겨져 링거를 꽂았다.
옆 침대를 정리하던 간호사들이 여기저기서 잡담을 나눴다.
“방금 응급실에 온 커플 누군지 알아요?”
“아니요, 남자는 진짜 멋있던데요.”
“멋있고 말고요. 방금 들었는데 보성 그룹의 대표래요.”
“말도 안 돼요! 그 사람이 재벌이었다고요? 아까는 완전 여친 뒷바라지하던데요. 꼬맹이 다루듯이 엄청 아껴 주더라고요. 부러웠어요.”
“돈 많은 남자는 바람둥이라고 하던데, 제대로 마음 붙일 사람 못 만나서 그런 거였네요. 아까 들으니 병원장님까지 VIP 병동에 불려 갔대요. 그 여자 천식 때문에 숨을 제대로 못 쉬어서 박 대표님이 눈이 빨개질 정도로 걱정하더라고요.”
“여자는 잠옷 차림이던데 약혼녀가 아닐까요.”
...
강서우는 시린 기운을 막으려 담요를 더욱 여몄지만 여전히 추웠다.
간호사가 링거를 확인하더니 걱정스럽게 조언했다.
“환자분, 집에 꼭 연락하세요. 이런 상태면 주변에서 보살펴줄 가족이 필요해요.”
강서우는 힘겹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편이 바빠서요. 시간이 없을 거예요.”
간호사는 더 묻지 않고 문을 닫고 나갔다. 복도에서 희미하게 나직한 한숨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같은 사람인데도 왜 이렇게 다를까요? 어떤 사람은 위궤양이 재발해도 알아주는 이 하나 없고, 또 어떤 사람은 천식 한 번으로 온 병원이 들썩이네요.”
강서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날 밤, 유난히 깊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제법 밝아졌을 때야 강서우는 눈을 떴다.
문득 떠올린 약속 시간이 있어 급하게 휴대폰을 꺼냈다.
읽지 않은 메시지는 열몇 개나 쌓여 있었는데 모두 유송아에게서 온 것이었다.
[언니가 소독약을 뿌린 덕분에 오빠 침대에서 잤어요. 엄청 크고 푹신하네요.]
[근데 언니 잠옷이 좀 끼더라고요? 목욕 가운도 안 맞고... 그래서 민재 오빠가 저를 안아줄 때 가슴 만지기를 좋아하나 봐요.]
[새벽 3시가 다 돼 가요. 제가 민재 오빠 침대에서 먼저 자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민재 오빠가 저를 위해 특별히 죽을 끓여 줬어요. 어렵게 구한 레시피라던데 감동이에요.]
...
마지막 메시지는 사진이었다.
박민재의 남성용 속옷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바로 옆에는 핑크색 여성 속옷이 구겨진 채 뒤엉켜 있었다.
강서우는 핑크색을 싫어한다. 그런 색 옷은 사 본 적도 없었다.
결국, 어젯밤 병원에서 돌아가자마자 둘이 함께 침대에 있었던 것이 확실해졌다.
참으로 절절한 사랑이다.
강서우는 심장 한구석이 다시금 쑤시는 걸 느끼며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억누르고 사진을 캡처해 둔 뒤 저장했다.
속은 텅 빈 느낌에 출출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위는 더 이상 쑤시지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다리가 여전히 후들거렸다.
강서우는 벽을 잡고 천천히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갔고 억지로 부탁해서 퇴원 수속을 밟았다. 더는 병원에서 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겨우 택시에 올랐을 때 박민재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 호텔에서 나와. 성 비서를 보냈어.”
몹시 당연하다는 듯한 명령의 어조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강서우는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듯 말이다.
강서우는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창백한 얼굴로 대답 대신 숨을 고르기만 했다.
“지금 호텔 아니야.”
“나갔어? 또 쇼핑이야?”
불쾌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오늘은 바쁘니까 쇼핑은 참아. 집에 들러서 송아 좀 챙겨 줘. 도우미들은 믿음이 안 가.”
강서우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혹시 박민재가 병원 가 봐야 하지 않겠냐고 묻을 줄 알았다. 비서 성주를 대신 보내서 병원에 함께 가라는 말을 기대한 그녀가 참 어리석었다.
말이 없자 박민재는 한결 부드러운 음성으로 덧붙였다.
“어젯밤 내가 좀 까칠했던 건 알아. 게다가 송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 것도 네 기분 상하게 했겠지. 그런데 원래 너희 사이좋았잖아. 괜히 나 때문에 틀어지지 말고 이번 기회에 잘 풀어 봐.”
강서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박민재가 얼마나 뻔뻔하고 무정한 사람인지 깨달았다.
“송아가 병원에 가게 된 건 네 책임이야. 말 들어.”
또다시 명령이다.
강서우는 아예 전화를 끊어 버렸다. 곧바로 박민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의사가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말래. 향초는 내가 버렸어. 다른 데 있는 것도 싹 다 처리해.]
과거 강서우가 수술을 마쳤을 때 박민재는 한 글자 한 글자 의사 지시를 꼼꼼히 노트에 적어 두고 소중히 지켰다.
그는 과연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이제 와서는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강서우는 약속 장소인 카페 근처 백화점에서 옷 한 벌을 사 갈아입은 뒤, 화장실에서 화장을 해 창백함을 감췄다. 그리고 시간을 맞춰 예약한 카페에 들어섰다.
진윤비는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운 인상에 날 선 분위기가 감돌았고 시선에는 경계 섞인 호기심이 번졌다.
“정말 팔 거예요?”
강서우는 맞은편 소파에 몸을 기대면서 냉정한 눈빛을 내보였다.
“진 대표님 야망이야 뭐, 저랑 상관없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 다음 주 월요일 열릴 미래 그룹 주주총회에는 참석하지 말고 한 주 더 기다려 줘요. 그 조건만 허락한다면 지금 당장 서류에 사인하죠.”
폭탄은 하나씩 터뜨려야 재미가 있다고 강서우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진윤비는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물었다.
“박 대표와 완전히 틀어진 건가요?”
구름시 재계라면 누구나 알듯이, 강서우가 박민재를 얼마나 열렬히 사랑했는지는 유명했다.
강서우는 몸을 살짝 일으켜 세우며 강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 봤다.
“진 대표님, 저는 이 지분을 마땅히 받아야 했어요. 이건 원래도 제거라고요. 그걸 이용해 내부 정보를 캐내려 한다면 거래는 없는 셈 치죠.”
주식을 가져온다고 해서 곧바로 미래 그룹을 송두리째 움켜쥐는 건 아니다. 최후의 승자는 결국 각자의 역량에 달려 있다는 의미였다.
진윤비는 더 묻지 않았다. 이내 신속하게 계약서를 꺼내 사인을 마치고 곧장 금액을 이체해 주었다.
돈이 계좌에 정상 입금된 것을 확인한 강서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