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강도하는 자신이 분명 임유나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왜 스스로 머리카락을 채취해서 검사를 맡겼는지 본인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그는 엄마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점점 받아들이고 있었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을 되짚어보면 놀랍게도 하나하나가 여전히 선명했다.
여섯 살 아이의 기억이 많으면 얼마나 많은가 물어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강도하는 그 시절의 기억이 너무 많았다. 엄마가 글자 하나하나를 가르쳐주던 모습, 같이 동물원에 가서 웃고 떠들던 모습, 따뜻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해주던 엄마의 모습이 모두 선명했다.
강도하는 소파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잊은 듯 있었다. 떠오르는 모든 기억들이 마치 다른 세상 속의 이야기처럼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 여자와 엄마는 너무나도 닮아있었고 ‘아가야’라고 부르는 톤조차 똑같았다. 이러니 억눌려 있던 추억들이 끊임없이 피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침 여덟 시가 되자 강도하는 급히 메일을 확인했다. 긴급 요청했던 검사 결과가 나왔다.
그는 자신에게 그 여자가 어떤 속임수를 부리고 있을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검사를 했다고 계속 말했지만 스크린에 닿은 그의 떨리는 손끝은 긴장되는 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기대가 있었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 기적이라는 것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메일을 열자 기적이 이루어졌다. 강도하는 충격으로 몸이 굳었다.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아도 눈앞에 놓인 결과는 믿기 어려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강도하는 본가에 전화를 걸었다.
“아가야, 엄마야. 너 지금 어디야? 엄마가 갈 테니 얼굴 보고 얘기할까?”
익숙한 목소리에 그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했다.
“점심에 돌아갈게요.”
그는 직접 확인해야 했다.
“그래. 엄마가 기다릴게.”
강도하는 전화를 끊고 헛발질을 하듯 화장실로 들어갔다. 몸은 깨어있었지만 생각은 이미 현실에서 멀리 떠난 듯했다.
그는 곰곰이, 잘 생각해 봐야 했다.
한편, 임유나는 강도하에게서 전화가 온 것만으로도 기뻤다. 아들이 검사 결과를 확인했음을 알고 있었다.
옆에서 강시후는 차갑게 말했다.
“도하는 아주 신중한 아이야. 아무리 많은 증거가 있어도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면 믿지 않아.”
임유나의 웃음이 잠시 멈췄다. 팔짱을 낀 채 강시후를 흘겨보며 말했다.
“도하가 어릴 때는 이렇게 고집이 세지 않았는데.”
어쨌든 그녀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기에 모든 검증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임유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강시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과의 일은 나중에 정리할 테니 각오하라고!”
“도하는 내가 만든 탕수육을 제일 좋아해. 지금부터 요리를 해야겠어.”
임유나는 주방으로 향하며 강시후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강시후는 기분이 상했다. 사실 자신도 탕수육을 좋아했는데 말이다.
‘이 집에서 나를 가장 좋아한다더니, 다 거짓말이었군!’
강시후의 예상대로 집으로 돌아온 강도하는 임유나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여전히 멀리서 거리를 두는 태도였다.
임유나는 마음의 준비를 이미 끝내놓고 있었기에 그렇게 속상하지도 않았다. 아이에게도 그 관계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하야, 네가 좋아하는 탕수육을 만들었어!”
임유나는 아들의 냉랭한 얼굴을 무시하고는 웃으며 식탁으로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강도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
임유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앞치마를 벗으며 손을 씻으려 했다.
“좋아. 너 먼저 서재로 가 있어. 바로 갈게.”
강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재로 향했다.
그는 내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강시후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물론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강시후도 그런 모습에 익숙해진 듯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서재 안에서.
임유나와 강도하는 마주 앉았다.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왜 그렇게 두려운 척했어요?”
강도하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임유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다섯 살 때 벌레만 보면 소리치며 멀리 도망가곤 했어. 그때 난 생각했지. 설마 여자아이랑 같이 있을 때 여자아이가 벌레를 보고 놀라 소리 지르면 너도 따라서 같이 소리 지르진 않겠지? 우리 아들이라면 여자아이를 구해주는 멋진 영웅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야.”
“난 일부러 겁먹은 척을 했어. 그러면 네가 내 앞에 서서 ‘엄마, 내가 지켜줄게요!’라고 말하면서 벌레를 잡아 멀리 던질 줄 알았거든. 그래서 김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우리가 자주 다니는 길에 일부러 벌레를 몇 마리씩 놓아두라고 했어. 넌 벌레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냈고 이제는 겁먹지 않잖아.”
강도하는 임유나의 부드러운 말투에 긴장된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갑자기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전에 그는 엄마에게 세상의 벌레가 모두 사라지게 해달라며 보챘었다. 엄마는 그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었다.
“아이고 우리 도하, 나중에 연애할 땐 어쩌려고 그래?”
이제 보니 그 기억은 맞아떨어졌다.
강도하는 어릴 적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며 임유나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그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던 단편적인 장면들은 전후 관계가 희미했는데 임유나의 설명을 통해 궁금증이 조금씩 풀려갔다.
기억 속의 엄마가 더욱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물론 임유나가 모든 기억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강도하가 말하는 몇몇 일들은 임유나에게도 희미하거나 잊힌 부분이 있었다.
“도하야, 이제 나를 믿겠니?”
임유나는 손을 깍지 낀 채 살짝 긴장된 눈빛으로 물었다.
강도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의 대답에 임유나는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이제 강도하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흐뭇했다.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저 먼저 갈게요.”
그렇게 말하며 강도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어딘가로 쫓기듯 발걸음이 빨랐다.
강도하는 임유나가 엄마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이 조금씩 자리 잡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어릴 적처럼 엄마에게 다가가 애교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15년이라는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 그의 마음에는 어색함과 거리감이 자리 잡아 있었다.
생각이 너무나 복잡해져 있던 강도하는 당분간 혼자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임유나는 그런 아들의 혼란을 이해하면서도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얘기 잘 안됐어?”
방금까지 베란다에서 전화를 받던 강시후가 다가와 차를 타고 떠나는 강도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15년 동안 헤어졌던 엄마가 갑자기 나타난 데다 타임슬립이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던졌으니 아이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게다가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두 사람 사이에는 새로운 관계 방식이 필요했다. 이제 아이는 더 이상 여섯 살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강시후는 임유나를 품에 끌어안고는 위로하며 말했다.
“괜찮아. 시간문제일 뿐이야. 결국엔 도하도 받아들일 거야...”
강시후는 임유나를 의자에 앉히고 옆에 있던 식탁을 무심코 보다가 말을 멈췄다.
“탕수육은 어디 갔어?!”
옆에서 마지막 요리를 식탁에 올리던 가정부가 대답했다.
“포장해서 도련님 차에 놓아드렸어요.”
임유나가 서재에 가기 전부터 부탁한 일이었다. 본능적으로 아들이 식사를 하지 않고 떠날 것 같아 미리 탕수육을 도시락에 싸 차에 두라고 한 것이었다.
그녀의 직감이 들어맞았다.
그 설명에 강시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면서 임유나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까 강도하를 붙잡았어야 했는데!’
임유나는 강시후의 심경 변화를 눈치채고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먹고 싶나 봐? 앞으로는 하는 걸 봐서 음식을 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