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오후에 강시후는 일이 있어 회사에 가봐야 했다.
임유나와 함께 가고 싶었지만 임유나는 집에 더 있고 싶다며 거절했다.
결국 강시후는 어쩔 수 없이 혼자 회사로 향하게 되었다. 떠날 때 집 안의 모든 것, 심지어 임유나의 머리끈이 어디 있는지까지 일일이 당부를 했다.
마지막엔 임유나가 그를 거의 밀어내다시피 했다. 말리지 않았으면 그는 30분이라도 더 얘기할 수 있었다.
‘아직도 그렇게 잔소리가 많네...’
임유나는 혼자 속으로 투덜댔다.
임유나가 강시후를 따라 회사에 가지 않은 데는 그녀만의 이유가 있었다. 강시후의 차가 저 멀리 사라지자 임유나는 김 집사를 서재로 불러들였다.
“김 집사는 10년 전에 강씨 가문에 왔나요?”
“네. 그렇습니다, 사모님.”
김 집사는 공손히 대답했다.
점심쯤 강시후가 김 집사에게 앞으로 집안의 모든 일은 임유나의 말을 들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말인즉 이제 임유나는 명실상부 강씨 가문의 여주인이란 뜻이었다.
“이제까지 대표님은 아이들과 잘 지냈나요?”
임유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강도하가 잠깐 집에 들렀던 동안 부자 간의 대화는 전혀 없었다. 이런 걸 보면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상당히 깊어 보였다. 그 생각에 임유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이에 대해 강시후는 그저 오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임유나는 그가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고 느꼈다.
“사모님, 제가 강씨 가문에 온 이후로 도련님 두 분과 아가씨는 이미 집에서 나가 계셨고 대표님도 자주 오시지 않았습니다...”
김 집사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 집에서 가장 생기가 돌던 날은 오히려 임유나가 돌아온 이후 이틀뿐이었다고 했다.
보통 강시후가 오면 3층에 있던 전처의 방으로 들어가 하루를 보낸 뒤 몇 날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집에 출입하던 강시후였다.
장남 강도하는 집에 와도 밤을 보내지 않았고 강로이와 강이안은 간혹 들르기도 했지만 학교 근처 집에서 더 많이 머물렀다. 이 본가에서는 가족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임유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정말이지 집안이 산산조각이 났구나!’
그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슬퍼할 필요 없었다. 이제 자신이 돌아왔으니 말이다.
김 집사에게서 더 이상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임유나는 그를 돌려보내려던 찰나, 김 집사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모님, 사모님이 돌아오신 뒤에야 대표님이 웃는 걸 봤습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대표님이 그렇게 행복하게 웃으시더군요.”
‘김 집사가 내 마음을 움직일만한 말은 참 잘하네.’
하지만 그대로 넘어갈 임유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 입가가 씰룩거렸다.
소설에서나 볼 법한 막장 로맨스는 절대적으로 사양이었다.
그런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의 전처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지 않던가...
다른 한편.
길게 늘어선 비즈니스 차량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차 안에서 강시후는 서류를 살피며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 앉은 두 명의 수행 비서들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강시후는 회사에서 부하 직원을 질책할 때조차 얼굴에 화난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문제점을 차분히 지적하고 눈빛만으로도 상대방을 땀을 뻘뻘 흘리게 만들며 다시는 실수하지 않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어떤 사람은 의도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이는 법이다.
김 집사가 한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임유나와 함께 있을 때의 강시후는 회사 직원들이나 집안 사람들 누구도 본 적 없는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강시후의 순수하고 다정한 면모는 오직 임유나만을 위한 전용 서비스가 된 셈이다. 심지어 그의 아들조차도 그런 다정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강시후는 강도하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요즘 그 사람을 방해하지 마.”
“흥, 도대체 뭐가 무서운 건데요?”
갑작스러운 부탁에 강도하는 비꼬듯 되물었다. 그러자 강시후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시 그 사람이 사라지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함부로 굴지 마.”
강도하는 말문이 막혔고 그 자리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아직 명확하지 않으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
강도하는 아무 말 없이 침묵했는데 그 침묵은 곧 대답이 되었다. 강시후는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내고 난 강시후는 코를 비비며 한숨을 쉬더니 차분히 말했다.
“모든 부서 매니저에게 알려. 오후 두 시 회의라고.”
장 비서가 곧바로 알겠다며 대답했다.
이때 강시후의 휴대폰에서 문자 메시지 알림을 울렸다. 그는 즉시 화면을 확인했다.
[사모님께서 김 집사에게 질문을 마치고 방에 가서 낮잠을 청하셨습니다.]
강시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어둡고 깊은 밤과 같았다. 이 모든 게 신비적인 운명이든 누군가의 조작이든 상관없이 그는 절대 임유나가 또다시 사라지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강도하의 태도가 어떻든 그는 받아들일 것이다.
임유나가 욕실에서 눈물을 흘렸던 장면을 본 순간부터 강시후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돌아온 사람이 바로 그녀, 임유나라는 것을.
사건의 전말이 무엇인지 아직 조사할 필요가 있지만 그는 그녀를 또다시 잃을 수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두 비서가 서로를 힐끗 보며 그저 조용히 있었다. 상황은 모르지만 지금 강시후의 기세는 평소보다도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임유나는 방에 돌아와도 잠을 청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소셜 미디어 계정에 접속했다.
카톡과 이메일 등 모든 계정을 차근차근 확인했다. 강도하와 만난 후 임유나는 다시 자신의 삶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15년 동안 세상에서 사라졌던 자신은 법적으로도 사망 판정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려면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가족에게는 타임슬립에 대한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떠벌린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임유나의 모든 계정은 강시후가 잘 보관해 두어서 바로 접속할 수 있었다. 아무 계정도 삭제되거나 정지되지 않았으며 지금 사용하는 전화번호 역시 15년 전 그대로였다.
카톡에 접속하자 오현주에게서 일주일 전 받은 메시지가 하나 보였다. 그 메시지에는 단 네 글자만 담겨 있었다.
[보고 싶어.]
오현주는 대학 시절 룸메이트였고 졸업 후에는 함께 화장품 회사를 설립한 동료였다.
지금 회사가 어떤 상태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 생각에 임유나는 카톡을 닫고 소셜 미디어에서 오현주의 아이디를 검색했다.
그녀는 과거 팔로워가 수십만 명에 불과했지만 현재 팔로워가 500만 명을 넘었다. 그녀의 프로필에는 노스스타 컴퍼니 화장품 회사 대표라는 소개가 쓰여 있었다. 아마 회사는 잘 성장한 듯했다.
두 사람은 동업자 관계였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임유나는 투자자에 가까웠다.
임유나는 예전의 자신이 사업적 안목이 있었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곧 웃음을 멈추게 되었다.
오현주의 게시물에 달린 댓글을 봤기 때문이다. 비난과 악플이 쏟아졌는데 댓글에 언급된 키워드를 따라가며 검색해 본 결과 임유나는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노스스타 컴퍼니가 출시한 화장품 제품이 대규모로 품질 문제를 일으킨 것이었다. 여러 함유 성분에 문제가 발견된 것이다.
제품의 품질도 문제였지만 임유나는 자신이 15년 동안 모습을 감췄는데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노스스타 컴퍼니 화장품의 사고 관련 키워드에서 화제가 된 글 하나가 있었다. 그 글은 회사 설립 초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내용에 따르면 문제를 일으킨 제품의 제조 비법은 또 다른 창업자가 제공한 것이며 그 창업자는 몇 년 전에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났고 오현주는 그와의 우정을 기리기 위해 해당 제품 라인을 계속 유지해 왔다고 적혀 있었다. 수익이 나지 않아도 단종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제조 비법이 문제가 되어 여러 차례 논란이 벌어진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해당 글은 제품 제조 비법이 10년 넘게 바뀌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오현주가 동업자에게 크게 당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임유나는 말문이 막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모든 걸 그녀에게 덮어씌우려는 의도가 너무 뻔했다.
15년이나 사라졌던 그녀가 갑자기 끌려와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필 임유나가 이 사태의 전말을 확인한 직후, 오현주는 곧바로 사과문을 발표했다.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며 사죄의 뜻을 밝혔다. 이어서 그녀는 인터뷰까지 진행했고 그 인터뷰 내용이 텍스트로 게시되었다.
인터뷰에서 오현주는 비록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폭로 글과 비슷한 내용을 전했다.
즉, 오현주는 좋은 사람이고 다른 동업자는 나쁜 사람이라는 식의 결론 말이다.
임유나는 말문이 막혔다.
돌아오자마자 커다란 누명을 쓰게 되다니!
제조 비법을 제공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