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박 씨 어르신도 마음이 복잡했다. 그의 마음은 도범이 추측한 것과 비슷했다.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람이 박이성을 전쟁터에 내보내지 않기 위해 도범을 데릴사위로 들인 것은 이미 박 씨 집안을 망신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체면을 깎이는 일이 일어날 줄 그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박시율과 도범이 결혼을 한 이튿날, 도범은 전쟁터로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시율은 임신 소식을 알려왔다.
그날 밤, 박시율이 술을 많이 마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도범이 박시율을 범한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었다.
하지만 박시율이 원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고 박 씨 어르신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다.
결국, 박 씨 어르신은 박시율과 그녀의 부모님, 그리고 14살이었던 그녀의 동생까지 박 씨 집안에서 쫓아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박시율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만든 것은 박이성이 저지른 짓이었다.
“정말 제 마음대로 적어도 되는 건 가요?”
도범이 냉랭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마음대로 적거라!”
도범이 드디어 돈 때문에 마음을 바꾼 줄 알고 박 씨 어르신은 속으로 기뻐했다. 박시율은 얼굴도 예뻤고 비즈니스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도범과 이혼을 하고 나면 돈 많은 사람을 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 성 도련님이 박시율을 따라다니고 있지 않은가.
“당연하지, 우리 어르신께서는 한다면 하시는 분이야. 그러니까 얼른 적어!”
나봉희가 흥분해서 말했다. 그리고 얼른 의아한 얼굴을 한 박시율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딸, 저거 봐, 내가 말했지. 도범은 그냥 배은망덕한 놈이야, 너는 도범을 위해서 아이를 낳고 5년을 기다리면서 고생했는데 저놈 결국 돈을 선택했잖아, 현실은 이런 거야!”
박시율은 멍청하게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동안 그 많은 고생을 하면서 기다렸는데 결국…
“범아, 너, 너 바보야? 저렇게 좋은 마누라를 어디 가서 찾을 수 있다고? 설마 돈 때문에 마누라랑 딸까지 버리려고 하는 거야? 시율이 너를 위해서 5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해가면서 손가락질이랑 비웃음을 감당했는데, 심지어 일자리도 없어서 쓰레기를 주우면서 살았는데!”
서정이 도범 앞으로 가더니 실망한 얼굴로 도범을 바라봤다.
“우리 이렇게 양심을 저버리면서 살면 안 돼!”
“어머니, 그냥 저 사람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세요!”
박시율의 눈빛 속에는 실망으로 가득 찼다. 힘들게 5년을 기다렸는데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되다니.
“봤지, 시율아, 좋은 남자 없다. 우리가 아이를 지우라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안 듣더니!”
박시연도 박시율을 비꼬았다.
“나는 남자친구 없지만 너처럼 저런 남자를 찾는 것보다 나은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봤어?”
박시율이 빨개진 눈으로 도범을 바라봤다.
“응!”
도범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수표를 집어 들더니 그 위에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다시 수표를 어르신에게 건넸다.
“다 적었어요,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가 원하는 만큼!”
“그래, 내 네 뜻대로 해주마!”
도범이 정말 돈을 선택한 것을 본 박진천은 조금 실망했다.
그래도 도범을 조금 믿고 있었던 그는 도범에게 능력이 있어서 자신의 손녀딸에게 잘해 줄 수 있다고 하면 그는 두 사람을 허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도범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범이 건넨 수표를 받아든 어르신은 제자리에 얼어버리고 말았다.
수표 위에는 999999999999999999...... 가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자 뒤에는 줄임표까지 적혀있었다.
“지금 장난하는 거냐?”
박진천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박준식도 얼른 다가가 수표를 보더니 소리쳤다.
“이 자식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우리 가지고 장난하는 거야?”
“왜 그러세요?”
박시연도 놀라서 얼른 다가갔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줄임표는 뭐고? 이게 얼마야?”
“어르신께서 마음대로 적으라고 해서 적은 건데 설마 못 주는 건 아니겠죠?”
도범이 큰 소리로 웃으며 물었다.
그리곤 박시율에게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저희 시율이 배달부인 저를 5년이나 기다리면서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감히 그까짓 돈으로 가늠하려고 하다니, 우리 시율이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바꾸지 않을 겁니다.”
“도범 너…”
박시율은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녀는 그제야 행복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박시율은 도범이 돈만 가지고 자신과 이혼을 하고 수아와 자신의 곁을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도범은 그 수표에 무수히 많은 9와 함께 줄임표까지 썼던 것이었다.
“어디 저도 한 번 봅시다.”
화를 내던 서정이 수표를 가지고 오더니 한 눈 보곤 흥분한 얼굴로 박시율에게 보여줬다.
“시율아, 이거 봐. 네가 우리 아들 마음속에서는 돈으로 메길 수도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인 거야!”
“네, 어머니.”
박시율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5년 동안이나 이 남자를 기다린 것이 맞았다. 그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감히 우리 박 씨 집안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이 사람 데리고 나가서 때려죽이고 밖에 던져버려!”
박준식이 화가 나서 말했다.
“싸움이요? 죄송한데 그거 제가 제일 잘하는 건데!”
“5년 동안 제 손에 죽은 적을 다 모아놓는다면 산 몇 채는 될 겁니다. 그 많은 고수들도 전부 제 손에 죽었습니다, 저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견뎌냈습니다, 여기에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죽을 수 없었습니다!”
말을 내뱉는 도범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내뿜었다.
“오늘 먼저 움직이는 그 사람에게 잘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가르쳐 주겠습니다!”
“오기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잊은 거야?”
하지만 그때 박시율이 굳은 얼굴로 도범에게 말했다.
그녀는 도범이 전쟁터에서 돌아오더니 강해지기는 했지만 허풍도 치기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더구나 이곳은 박 씨 집안이었다. 그리고 도범은 이 집의 데릴사위였기에 자기 집안사람과 싸움을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도범은 그제야 자신이 박시율에게 한 약속이 생각나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큼큼, 농담이야, 시율아.”
하지만 그때 문 앞에 있던 보디가드들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물렀거라!”
보디가드들이 도범에게 손을 대려던 찰나, 박 씨 어르신이 차갑게 말했다.
보디가드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다시 나갔다.
“아버지, 이 자식이 지금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다는 거 모르시겠어요?”
박준식은 화가 났지만 어르신의 말을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그는 박 씨 집안의 주인이고 그의 아들인 박이성은 하람그룹의 대표님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실권을 가지고 박 씨 집안의 큰일을 결정하는 이는 바로 박 씨 어르신이었다.
“우리를 가지고 장난쳤다고 할 수 없다, 내가 마음대로 적으라고 한 것이니. 하지만 우리가 도범이 요구한 돈을 줄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박 씨 어르신이 씁쓸하게 웃더니 다시 말했다.
“도범,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5년이나 되었구나. 우리 손녀딸도 그동안 온갖 고생을 했지, 두 사람이 정말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고 수아도 많이 컸으니 강제로 이혼하라고 하지는 않으마!”
말을 멈췄던 어르신이 다시 분위기를 바꿔 말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