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최하준은 이마를 문지르다 톡 요청을 수락했다.
곧 강여름이 톡을 보냈다.
“여보, 저녁은 집에서 먹을 거예요?”
하준 : 안 갑니다. 그렇게 부르지 마시죠.
하여간 love : 그래요? 그럼 쭌이라고 할게요, 쭌 좋네요.
하준 : ⋯⋯.
‘아, 반품해 버릴까?’
******
그날 밤.
고색창연한 한옥에 사람들이 모여 식사 중이었다.
변호사들이 새로 들어온 의뢰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최하준은 그저 듣는 시늉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톡이 울렸다.
여름이 사진을 보냈다. 따스한 조명 아래 토실토실한 고양이가 바닥에 엎드려 행복한 얼굴로 멸치를 물고 있는 사진이었다.
하여간 love : 쭌, 걱정 말고 식사 모임 잘 하고 오세요. 지오는 제가 잘 돌보고 있답니다.
어이없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식탐냥이라니까. 벌써 매수당한 거냐?’
******
9시 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던 최하준은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집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까만 소파는 청록색 덮개가 깔려 있고 하얀 식탁에는 초록색 물결 무늬 식탁보가 덮여 있고, 그 위에 분홍 수국을 꽂은 유리 화병이 놓여 있었다.
집에 화초와 꽃이 가득했다. 발코니에는 주렁주렁 화분이 걸려있었다.
‘잘못 들어왔나?
다른 집인가?’
“왔어요, 쭌?”
작은 방에서 여름이 걸어 나왔다. 치맛자락에 하얀 토끼 무늬가 있는 와인색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다.
풍성한 브라운 헤어가 어깨에서 찰랑거렸고, 치맛자락 아래로 눈처럼 새하얀 두 다리가 보였다.
그야말로 요정 같은 자태였다.
최하준이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이런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까?”
“이게 뭐 어때서요?”
여름이 천연덕스럽게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가슴이 보이길 하나, 배가 드러나길 했나, 무릎이랑 종아리밖에 안 보이잖아요. 나가 봐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입고 다니나. 이렇게 입는 것도 안 된다고요?”
골치가 아팠다. 물론 노출이 심한 건 아니지만 속에 아무것도 안 입질 않았는가 말이다.
최하준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
“들어와 사는 건 동의했습니다만 집을 이 꼴로 만드는데 동의한 건 아닙니다.”
“좋잖아요. 집이 집 같지도 않고 너무 썰렁하더라고요. 뭐라 그러지 말아요. 저 많은 화분을 옮기느라고 상처까지 났는데.”
여름이 최하준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내보이며 말했다.
눈으로 힐끗 보니 보드랍고 가느다란 손에 여기저기 상처가 보였다.
“자업자득이지.”
말을 뱉더니 최하준은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름은 코를 씰룩거리더니 등 뒤에서 메롱을 해 보였다.
외숙모가 되려는 생각이 아니었으면 자신도 이렇게 목석 같은 남자에게 애교를 떨 일이 없었다.
*******
이튿날 7시.
정해진 시간에 일어난 최하준이 방문을 열고 나오다가 화장실에서 양치하는 여름을 보게 되었다.
“쭌, 좋은 아침. 달리기 하러 가게요?”
평범한 검은색 운동복인데도 최하준이 입으니 모델 같은 느낌이었다.
‘성질은 더러우면서 외모 하나는 나무랄 데가 없단 말이야.
아침 일찍 달리기를 하다니 생활 습관도 나쁘지 않고.’
“네.”
최하준은 조금 놀랐다.
저 나이대의 여자들은 다들 늦잠을 자는 줄 알았는데 여름은 꽤나 일찍 일어난 것이다.
“아침 식사 차릴 테니까 빨리 들어오세요.”
사뭇 다정한 말투였다.
“밖에서 아무거나 사 먹지 말고요.”
최하준이 미간을 찡그렸다.
“됐습니다. 그나저나 이사는 언제 나갈 겁니까?”
여름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고 최하준이 말을 이었다.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당신하고 얽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관심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더니 나가버렸다.
못 참겠다는 듯 여름은 머리를 헝클었다.
그렇게 거실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들어와 보니 주방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갑자기 허기가 지는 것 같았다.
“아침 준비됐어요. 밥이랑, 미역국이랑⋯.”
주방에서 몸을 반쯤 내밀고 여름이 말했다.
“저는 아침에 밥 안 먹습니다.”
최하준은 냉정하게 거절을 했다. 아침에 그 정도로 냉정한 소리를 들었으면 벌써 집을 나갔을 줄 알았지 이렇게 밥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여름이 한 밥을 먹을 수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응석받이는 손가락에 물도 안 묻히고 자라는 법이다.
그런 사람을 어디 한두 번 보았던가.
최하준은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냈다.
여름이 입을 비죽거렸다.
‘밥을 안 먹는다더니 빵을 먹는다는 소리였어.’
상대는 안 먹어도 여름은 밥을 먹을 참이었다.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최하준은 우유를 데우려다가 주방에서 여름이 보글보글 미역국을 끓이는 모습을 보았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가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보아하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옆에서는 계란말이가 익어가고 있었다.
불 가에 서 있는 여름의 뺨이 발그레했다. 볼도 통통하니 꽤나 귀여웠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최하준에게 여름이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 올려 보여주었다.
“쭌, 진짜 맛도 안 볼래요?”
“⋯⋯ 관심 없습니다.”
최하준은 얼른 시선을 돌리고 우유를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식빵을 토스터에 구워 베이컨과 양상추를 끼워 넣고는 먹었다.
그러나 보글보글 끓던 미역국을 떠올리니 갑자기 샌드위치가 맛없게 느껴졌다.
최하준은 짜증스럽게 빵 위에 잼을 발랐다.
이때 여름이 밥이며 미역국, 명란계란말이에 감자볶음, 시금치무침, 조기구이 등을 가져와서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최하준에게 여름이 순진무구한 척 눈을 깜빡여 보였다.
“쭌, 내가 밥을 먹는 데는 불만 없겠죠?”
최하준은 아무 말 없이 여름의 먹방을 바라보았다.
여름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침엔 역시 밥이지, 암. 아침에 샌드위치라니 자기 혀를 괴롭히는 일이잖아.”
명란계란말이를 입에 넣고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고소하고 보드라운 이 맛, 정말 최고야.”
연기를 하는 폼이 아주 배우가 따로 없었다. 여름은 이렇게 해서 과연 최하준에게 밥을 먹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