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반전이 너무 빠르잖아.’
여름은 술을 너무 마셔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윤서가 와서 어깨를 툭 치며 안 됐다는 듯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라. 잘난 남자 마음 얻기가 어디 쉽니? 다음에 다시⋯.”
“아니, 내일 10시에 구청으로 나오래.”
강여름이 멍하게 대답했다.
“⋯⋯.”
당황한 윤서가 잠시 침묵하더니 잠시 후 깔깔 웃었다.
“축하해. 이제 선우 오빠 외숙모가 되시겠네.”
여름이 물었다.
“진짜일까?”
윤서가 여름의 말랑한 뺨을 꽉 꼬집었다.
“왜 아니겠어? 네 미모면 어지간한 한 아이돌한테도 안 밀려. 내가 남자였으면 한눈에 반했을걸. 가자! 결혼 축하주 한잔해야지.”
여름은 자리를 비운 새 아무래도 윤서가 술을 너무 마셨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본인도 아까 먹은 술기운이 도는지 슬슬 머리가 아파졌다.
바 입구로 고급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왔다.
주차요원이 차 문을 열자 최하준이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더니 가죽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었다.
“이번에는 좀 눈에 띄지 않는 거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나?”
공손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쪽 집에 있는 것 중에 제일 얌전한 차로 가져왔습니다만.”
하준이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동성에 온다는 건 누가 알고 있나?”
“큰 사모님만 알고 계십니다.”
하준의 얼굴이 풀어졌다. 방금 그 여자는 우연히 나타난 모양이었다.
“사람 하나 조사해서 날 밝기 전까지 자료 좀 가져오지.”
*****
아침 햇살이 커튼을 뚫고 들어왔다.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던 여름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눈을 뜨니 한선우가 성큼성큼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게 보였다.
윤서가 그 뒤에서 화를 냈다.
“여긴 내 집이에요. 이거 가택 침입이라고요.”
“역시나 여기 있었구나.”
한선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여름을 쳐다보았다. 새카만 머리는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여름은 잠이 확 깼다.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윤서가 말했다.
“할 말 많겠지. 천천히들 말씀 나누셔.”
윤서가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방은 조용해졌다. 한선우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여름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머리를 홱 돌려 손길을 피하며 여름이 비아냥거렸다.
“오빠 여기 있는 거 강여경도 알아?”
일순 한선우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그대로 주먹을 꽉 쥐고는 한동안 있었다.
“네가 모르는 게 있어. 너희 집에서 회사 지분의 80%를 여경이에게 주기로 했어.”
여름은 깜짝 놀랐다. 입술이 창백해졌다.
“그럴 리가.”
“사실이야. 너희 아빠가 직접 말씀하신 거야..”
여름의 머리가 멍해졌다.
소꿉친구였던 전남친을 보니 눈물이 흘렀다.
“그래서 날 버리고 강여경한테 갔다고?”
한선우가 여름의 손을 꽉 잡았다.
“잠깐만 참아. 약혼만 한 거야. 결혼은 최대한 미룰 거야. 나에게 배다른 형제 있는 건 너도 알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쪽을 이길 수가 없어. 여름아, 난 너랑 잘 살고 싶어.”
“웃기시네.”
여름이 한선우의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겨우 스물여덟 젊은 나이에, 물려받지 못하면 스스로 창업을 하면 되잖아!”
“넌 정말 너무 순진하구나.”
한선우가 천천히 일어서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어떤 일은 처음부터 정해진 거야. 선택의 여지가 없이⋯.”
여름이 쓴웃음을 지었다.
‘말이 안 통하는구나.’
잠시 침묵 후 한선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3년 만 시간을 줘. 여름아, 아직 어리니까 기다려줄 수 있지?”
여름은 너무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꽃 같은 청춘을 버려가며 기다리라는 말을 저렇게 뻔뻔하게 하다니!
“내가 무슨 사랑에 빠진 순정만화 주인공인 줄 알아? 사업 때문에 강여경하고 약혼도 하는 남자가 3년 뒤에는 결혼도 할지 누가 알아? 됐어. 꼴도 보기 싫어. 내 눈앞에서 사라져!”
“널 향한 내 마음은 시간이 증명해 줄 거야. 실컷 화내. 하지만 다시는 홧김에 술 마시지 마. 몸 상할라.”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한선우는 부탁을 남기고 돌아섰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여름은 베개를 집어 던졌다.
멍하니 앉아 있던 여름은 갑자기 후다닥 옷을 입고 뛰쳐나갔다.
“선우 오빠는 벌써 갔는데, 어디 가려고?”
윤서가 급히 여름을 막아섰다.
여름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10시에 혼인신고 하러 가기로 했잖아.”
윤서가 말했다.
“⋯⋯그걸 믿는다고?”
어이없다는 듯 윤서가 픽 웃었다.
“너 어제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만약에 그 사람이 진심이었으면?”
여름이 윤서를 밀치고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