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너무해요! 말도 안 되잖아요!”
여름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차마 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네 언니가 밖에서 20년 동안 고생을 하다 왔는데, 언니의 남자친구를 뺏을 생각이나 하다니. 넌 양심도 없니?”
여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어머니를 쳐다봤다.
“엄마, 선우 오빠는 내 남자 친구잖아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강여경은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내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다. 그런데 여름이가 출장을 다녀와 보니 강여경은 자신의 남자친구인 한선우와 나란히 앉아 팔짱을 끼고 있다니....
저쪽에서는 양가 부모님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선우는 강여름이 어릴 때부터 사귄 남자친구였는데!
참지 못하고 물었다가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고 만 것이다.
“엄마, 그러지 마세요.”
강여경이 애처롭게 말했다.
“모두 제 잘못이에요. 돌아오지 말았어야 해요.”
한선우가 얼른 여경의 어깨를 감쌌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잘못은 내가 했지. 동생처럼 대해줬더니 여름이가 착각했었나 봐.”
여름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너무 아파서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동생이라고?
동생 같아서 미래를 약속한다고 속삭인 건가?
동생 같아서 그렇게 날 품에 안아 주었던 거야?’
“입 다물어!”
여름은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입은 네가 다물어라. 동생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여름의 어머니가 언짢은 듯 말했다.
“여경이가 밖에서 20년을 고생했는데, 네가 좀 양보하렴.”
여름은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양보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사랑하는 남자를 내놓으라니⋯.’
이때 여름의 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됐다. 애초에 선우는 널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약혼식 일로 상의할 게 있으니 너는 좀 나가 있거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만히 있는 한선우를 쳐다보다 한선우에게 기댄 여경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자신이 웃음거리가 된 것 같았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이 이제 모두 강여경의 편만 들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쓱 닦아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여름은 스포츠카에 올라 미친 듯 질주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차를 세우고 절친인 임윤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와, 한잔하자.”
목이 좀 잠긴 것 같았지만 윤서는 바로 대답했다.
“알았어, 간다.”
******
S1897 바.
윤서가 부랴부랴 들어갔을 때 여름은 이미 혼자서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 있었다.
“마침 잘 왔다. 같이 마셔! 술을 엄청 주문했단 말이야. 다 마시기 전까지는 아무 데도 못 가.”
여름은 술병을 옆으로 밀었다.
“뭔 일이래?”
여름이 이러는 건 드문 일이라 걱정이 됐다.
“선우 오빠는 어디 가고?”
그 사람의 이름을 듣자 심장이 칼로 도려낸 듯 아팠다.
“이제 난 필요 없대. 강여경이랑 약혼한대.”
윤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뭔 막장 드라마 같은 소리야?”
여름은 저녁에 벌어진 일을 대략 전했다.
윤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선우와 여름은 어려서부터 함께였고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다.
그러나 여름이 유학을 가고 한선우의 일이 바빠지면서 약혼을 미루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들도 사정을 다 알고 계셨고 둘을 축복해 주셨다.
이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결혼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선우가 강여경과 약혼이라니, 여름은 이제 웃음거리가 되었다.
“너무 하잖아. 다 똑같은 자식인데 너희 엄마 아빠 머리가 어떻게 되신 거 아니야?”
여름이 술병을 움켜쥐었다.
“강여경이 고생을 하다 돌아왔다고, 좋다는 건 있는 대로 다 해주고 싶으신가 봐.”
윤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너도 딸이잖아!”
여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부모님 마음속에는 지금 강여경 뿐이지.”
“내가 바보지. 어릴 때부터 선우 오빠랑 결혼시킨다고 했다고 그걸 믿었잖아.”
“선우 오빠도 그래. 평생을 함께 한다더니⋯ 오빠가 너무 밉다.”
마지막 말을 하며 목이 멨다. 술병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다가 눈물이 울컥 났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만 마셔. 위도 안 좋으면서 병 나려고.”
윤서가 술병을 빼앗으며 여름의 주의를 돌릴만한 것이 있는지 술집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야, 저기 좀 봐!”
윤서가 여름을 쿡쿡 찌르더니 구석에 앉은 남자를 가리켰다.
어슴푸레한 조명 속에서 이런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양복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우수에 젖은 남자는 눈을 감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돌아가는 조명이 한 번씩 언뜻 비추는 옆모습은 만화를 찢고 나온 듯했다.
여름은 한 번 쳐다보더니 시선을 거두었다.
“아무리 잘생긴 남자라도 지금은 구경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저 사람은 선우 오빠 외삼촌이라고.”
여름은 깜짝 놀랐다.
“진짜?”
한선우가 베일에 가려진 외삼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해외에서 회사를 관리하고 있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그런데 얼마 전 외삼촌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럼, 확실하다니까. 지난번에 시음회 갔을 때 우리 오빠가 가르쳐 줬는 걸. 나이도 별로 안 많은데 수완이 좋대. 선우 오빠네 아빠도 몇 번 못 봤다더라.”
한선우의 아버지 한준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여름의 눈이 반짝하더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저 외삼촌하고 결혼하면 어떨까?"
“풉!”
윤서는 놀란 나머지 술을 뿜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라.”
여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 남자를 쳐다봤다.
“오빠랑 결혼을 못 할 거라면 외숙모가 되어서 그 역겨운 인간들을 혼쭐 내 주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