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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장

차창 밖을 내다보던 남연풍은 눈앞에 보이는 집이 왠지 낯익어 보였다. 이때 고승겸은 비바람을 무릅쓰고 차 옆으로 다가와 문을 열고 몸을 굽혀 그녀를 거침없이 차에서 안아올렸다. “고승겸,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아직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고 싶은 거야?” 고승겸은 남연풍의 비난에도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고승겸!” “아무 말도 하지 마.” 고승겸은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는 남연풍을 집안의 소파에 앉힌 뒤 다시 차로 돌아가 트렁크에서 짐과 남연풍의 휠체어를 들고 들어와 문을 닫았다. 창밖에는 비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었고 하늘은 수많은 별들을 품은 채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고승겸은 따뜻한 느낌의 전등과 집안을 따뜻하게 데워 줄 난방을 켰다. 12월 한겨울의 찬 기운을 조금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금세 집안 공기가 훈훈해졌다. 고승겸은 겉옷을 벗고 남연풍의 맞은편에 천천히 앉더니 빨간 사과를 하나 집어 들고 깎기 시작했다. 남연풍은 차가운 시선으로 고승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다가 아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고승겸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지켜볼 작정이었다. 고승겸은 사과를 깎는 동안 한 번도 남연풍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사과를 하나 다 깎고서야 동작을 멈추었다. “지금 이런 결과에 만족해?” 고승겸이 무겁고 경직된 공기를 가르며 입을 열었다. 그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짙은 그의 검은 눈동자를 들어 올리며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연풍을 바라보았다. “내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는 순간 당신까지 나서서 그럴 줄은 정말 몰랐어.” 고승겸은 자조 섞인 웃음을 날리며 손에 쥐고 있던 과도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 놓았다. 이윽고 그는 들고 있던 사과를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는 갑자기 일어서서 훤칠한 키와 꼿꼿한 몸을 내세우며 천천히 남연풍에게 다가갔다. 반짝이는 불빛을 등에 업은 거대한 그림자가 내리쳐 마치 짙은 어둠이 남연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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