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사실 조경선의 생모는 본래 태부 조두훈의 정실 부인이었다. 그러나 혼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두훈이 여정 옹주와 정을 통하는 바람에 황제가 직접 하명을 내려 둘을 혼인시켰다.
옹주는 그 신분이 높았기에 조경선의 생모는 정실 자리에서 밀려나고 결국 측실로 강등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정실 부인의 자리는 옹주에게 넘어갔고 옹주는 아들딸을 낳은 뒤에도 그녀와 그녀의 딸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비록 그녀가 원래의 조경선은 아니지만 이 육신을 차지하고 있는 이상 남의 딸의 이름을 빌려 사는 처지로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조아람은 자신의 협박이 효과를 발휘한 것을 알자 거만하게 일어섰다.
“됐어. 너랑 쓸데없는 말다툼할 시간 없다. 경고하는데 진왕부에서는 얌전히 처신해. 괜히 조씨 가문에 폐를 끼치지 말라고.”
조경선은 속으로 의심스러웠다.
너무나도 이상했다. 그녀가 막 연향을 거절하자마자 조씨 가문에서는 정확한 시점에 새로운 인물을 들여보냈다.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와 같은 불쾌감을 느낀 사람이 또 있었는데 바로 남궁진이었다. 주영의 보고를 듣자 그의 짙은 눈동자에 싸늘한 빛이 번졌다.
“왕비가 거절하지 않았다고?”
주영이 고개를 저었다.
“조씨 가문이 날 안중에 두지 않고 제멋대로 사람을 들였단 말인가?”
그 여인은 분명 조씨 가문과 한통속이었기에 조용히 지낼 리가 없었다.
암위의 감시가 없었더라면 그는 심지어 조경선이 연향을 일부러 거절한 것인지도 의심했을 것이다.
남궁진은 차갑게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조씨 가문, 그야말로 독이 든 가시 같은 존재였다.
정임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조경선은 연향의 집에 갈 때마다 조심해야 했다. 괜히 그녀가 조씨 가문에 헛소리를 더해 떠벌린다면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한두 번은 피할 수 있었지만 정임은 영리했다. 금세 조경선이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조경선은 매번 ‘시내 구경’이라는 핑계를 대며 초연만 데리고 나갔다. 홍난은 그 틈을 타 정임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번에 나가려 할 때 정임은 미리 자는 척을 했다.
홍난은 그녀가 정말로 잠든 줄 알고 방심했고 조경선이 집을 나서는 소리가 들리자 정임은 몰래 뒤를 따랐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따라가다가 마침내 조경선이 한 가난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정임은 조용히 창호지를 찢고 벽에 기대어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들려온 말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경선이 그동안 이 집 노인의 병을 치료하고 있었다니!
“어르신의 상반신은 이미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다만 다리에 습기가 깊이 스며 있어 당장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앞으로 두어 차례 더 침을 놓으면 걸을 수 있을 겁니다.”
조경선이 은침을 정리하자 연향 부녀는 연신 감사 인사를 건넸다.
문 밖에서 듣고 있던 정임은 입을 틀어막았다.
조경선이 의술을 익혔다고? 그럴 리가!
그녀는 눈을 번뜩이더니 바로 진왕부로 돌아가지 않고 먼저 조씨 가문으로 향했다.
정임의 보고를 들은 조아람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어머니! 조경선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왜 집에 있을 땐 전혀 알지 못했던 거죠?”
여정 옹주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번졌고 그녀는 정임에게 물었다.
“의술 외에 그 계집에게 다른 수상한 점은 없었느냐?”
“왕비 마마께서는 저를 멀리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어요. 평소에도 저를 가까이 두려 하지 않으셨지요. 그러나 제가 무례한 언사를 했을 때도 전처럼 노여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정임은 덧붙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며칠 전 마마께서 진왕부의 한 관리인을 꾸짖으시고 이후 전하께 강제로 그 사람을 교체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관리인은 지금도 왕부에 머물고 있으나 마마를 보면 두려워하며 피하고 있습니다.”
여정 옹주는 길고 가느다란 손톱을 매만지며 더욱 음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난 그 계집에게 그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구나. 조경선, 감히 날 속이고 가식을 부려?”
조아람은 순간 긴장했다.
“어머니, 만약 조경선이 저희가 예상했던 것보다 똑똑하면 어쩌죠?”
“뭘 걱정하느냐?”
여정 옹주는 비웃음을 지었다.
“그 계집이 아무리 영민하다 한들 결국은 천한 첩의 자식일 뿐이다. 그 계집이 어찌 감히 너랑 비교할 수 있겠느냐? 이제 곧 오황자가 봉호를 곧 얻을 것이다. 오황자는 란비의 유일한 아들이니, 태자로 책립될 가능성이 가장 크지. 네가 오황자랑 혼인하고 후일 황후가 되면 조경선 따위가 감히 네 앞에서 고개를 들 수나 있겠느냐?”
여정 옹주의 매서운 얼굴에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더군다나 네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다. 진왕부의 그 사람만 있어도 충분하다. 진왕은 본래부터 타인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성정이니 조경선이 무슨 수로 발버둥을 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오황자의 이름이 나오자 조아람의 얼굴이 붉어졌다.
“전하께서 저를 모란각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오늘 저녁은 집에서 들지 않을게요.”
“너도 사내를 상대할 땐 적당히 밀고 당겨야 한다. 너무 쉽게 마음을 다 주지 마라. 부부라 할지라도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알아요, 어머니.”
조아람은 입으로는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개의치 않고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정임이 황급히 돌아와 석조각으로 들어서자 마침 조경선이 의자에 앉아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꿇어라.”
조경선이 가느다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매서운 눈길을 보내자 정임은 본능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무릎을 꿇지 않고 불복하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마마께서 무슨 권리로 저를 무릎 꿇게 하시나요?”
조경선은 손에 두 개의 작은 돌을 가지고 놀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그녀의 손가락이 튕겨지며 두 개의 돌이 정확히 정임의 종아리 혈점을 맞혔고 다음 순간 그녀는 퍽 하고 무릎을 꿇었다.
정임이 소리쳤다.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방금 몰래 저택을 빠져나갔지? 어디에 갔었느냐?”
“그냥 한바퀴 돌았을 뿐인데 마마께서 이런 잡다한 일까지 따지시다니요. 하인을 학대한다는 소문이 나면 평판이 좋지 않을 텐데요.”
조경선은 무심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평판? 내 평판은 이미 바닥이니 한가지 더 늘어나도 상관 없겠지. 너는 왕부의 몸종으로서 내 허락 없이 무단 출입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날 추적하고 조씨 가문에도 갔더군.”
정임은 그녀가 알고 있을 줄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