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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거 놔!” 나는 점차 감정을 추슬렀다. 시선을 그의 얼굴에서 떼어내며 다시금 현실을 자각했다. ‘지금 나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 강재욱 앞에서 작은 빈틈조차 보여선 안 돼!’ 그와 함께한 지난 3년 동안, 그는 송지우를 위해 처음을 남겨두려 했다. 하지만 내 옷을 벗기거나, 나에게 키스하거나, 심지어 나를 씻기는 일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게 했고, 더 심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과거에는 그게 배려라고 착각했었지만 이젠 그 모든 행동이 나를 철저히 짓밟으며, 송지우를 위해 복수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너한테 너무 잘해줬나 보지? 뭘 그렇게 수치스럽고 억울한 척하는 건데?” 강재욱이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갑자기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거칠게 훑더니, 자제라도 하려는 듯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손을 거두었다. “내 앞에서 갈아입어.” 그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침대 옆에 앉아 여유롭게 옷깃의 지퍼를 내려 목덜미를 드러내며 달아오른 열을 식히려는 듯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내 옷깃에 시선이 머물자, 그의 목젖이 천천히 움직였다. “친구가 아직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야?” 내 한마디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벌어진 옷깃을 다시 여몄다. 강재욱은 송지우를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둘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송지우 앞에서 자신의 이렇듯 헝클어진 모습을 보일 리도 없었다. “빨리 갈아입고 내려와.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마지막 경고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나는 힘없이 침대에 주저앉으며 비로소 실감을 했다. ‘내가... 정말로 환생이라도 한 거야?’ 돌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는 듯한 고통... 그 감각이 단순한 꿈일 리가 없었다. 꼬리뼈와 머리가 여전히 욱신거렸고, 그때의 통증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억누르며 나는 서둘러 스키복으로 갈아입고 흰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오크밸리 리조트에는 많은 투숙객들이 묶고 있었다. 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누군가가 친절하게 버튼을 눌러 주었다. “고맙습니다.” “아... 아닙니다. 몇 층 가세요? 제가 눌러드릴게요.” 엘리베이터를 잡아준 남자는 부끄러운 듯 얼굴이 빨개졌지만, 몇 번이고 내 얼굴을 흘끔거렸다. “1층이요. 감사합니다.” 그는 재빨리 1층 버튼을 눌렀다. “혹시 주변에 편의점 같은 곳 있나요?” “네! 있죠! 필요한 거 말씀하시면 제가 사다 드릴 수도 있는데... 혹시 연락처라도...” 내가 몇 가지 필요한 물건을 얘기하자, 그 남자는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 물건들을 나지막이 반복하여 말하며 급히 뛰어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헐떡이며 돌아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여기요! 필요하신 물건 사 왔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봉지를 받았다. “죄송하지만, 제가 휴대폰이 없어서요. 연락처를 주시면 나중에 돈을 보내드릴게요.” 나는 장갑을 벗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여기에 적어 주세요.” “아, 아니에요! 돈 안 받아도 돼요. 별거 아니니까요. 아, 그래도 꼭 갚고 싶다면야... 제 번호가 카톡 아이디랑 같거든요! 언제든 연락하세요!” 볼이 발그레해진 그 남자가 프런트에서 종이와 펜을 빌려와 신중하게 번호를 적으려는 순간, 강재욱이 나타나 그의 손에서 펜이 홱 낚아챘다. 그리고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펜을 돌리며 장난스럽게 흔들다가 펜을 부러트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남자가 난감한 표정으로 항의하려 하자, 강재욱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여자는 내가 물 좋은 바에 연락해서 부른 '도우미'야. 꽤나 비싼 여자라고...” 그 한마디에 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남자는 순간 얼어붙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요... 그런 일 하는 사람일 리가 없잖아...” 그러나 강재욱은 가소롭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는 마치 강아지 목덜미를 가로채듯 내 목덜미를 거칠게 감싸 쥐고 강제로 끌고 가버렸다. 나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단단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둥글게 정리된 손톱이라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지만, 통증이 나를 정신 차리게 했다. ‘침착해! 반드시 냉정해야 해. 이번 생에서는 끝까지 살아남아 강재욱을 지옥으로 보내야 해!' 강재욱은 내 손에 들려 있던 비닐봉지를 낚아채더니 그는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볼 생각도 없이 쓰레기통으로 휙 던져 버렸다. “내 기분 상하게 하는 짓은 하지 마.” 전생에서도 이 말을 수없이 들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바보같이 강재욱이 질투하는 거라 착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나한테 시간 낭비하는 게 싫었을 뿐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이렇게 추운 날, 그가 진짜로 아끼는 송지우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가 조금이라도 고생할까 봐 걱정되었을 것이다. 문을 나서자, 매서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송지우가 재채기했다. 강재욱은 눈이 두껍게 덮인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추위에 약한 거 알잖아. 이거 꼭 들고 있어.” 송지우는 빨갛게 언 코를 문지르며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괜찮아. 이거 아린이한테 줘. 여기 오기 전에 경서가 하나 챙겨줬거든. 난 하나면 충분해.” 이 시점에서 나는 송지우와 친분이 깊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처음 보는 나에게 스스럼없이 이름을 불러주었다. 전생의 나는 그녀의 다정함에 속아 그녀를 친구라고 여겼었다. 강재욱은 고집스럽게 송지우의 손에 핫팩을 쥐여주었다. “내가 주는 거니까 더 따뜻할 거야.” 송지우의 시선이 내 얼어붙은 두 손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곧 시선을 거두고는 귀여운 척 볼을 부풀리며 핫팩을 옷 속에 넣었다. “알았어... 네가 준 핫팩이니까 더 따뜻하다고 칠게. 진짜 유치해.” 나는 그저 투명 인간처럼 행동하며 조용히 상황을 지켜봤다. 시력을 잃었다가 되찾으니, 현실은 그동안 내가 상상했던 세상과 완전히 달랐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들은 내게 했던 짓을 송지우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묵인했다. '아니야! 어쩌면 송지우가 직접 이 모든 걸 꾸민 주동자일지도 몰라!'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한 나는 황급히 균형을 잡았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어요.” 고개를 돌리자 낯선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처음 오셨어요? 같이 좋은 시간 보낼래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강재욱이 성큼 다가왔다. “꺼져.” 그의 날 선 목소리에 남자는 움찔하며 얼굴이 굳은 채 서 있다가 결국 불쾌한 기색을 감추며 자리를 떠났다. “아린이 인기 많네? 다들 아린이한테 말 걸잖아.” 송지우가 웃으며 내 팔짱을 꼈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손가락을 흔들며 내 앞에서 장난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근데 아린이는 안타깝게도 앞을 못 본다며? 재욱아, 아린이 눈은 정말 치료해 볼 가망도 없는 거야?” “응. 영원히 시력을 잃었어.” 강재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자 송지우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안타깝다... 이 세상은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눈으로 봐야 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전생에 송지우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그저 서러움과 자괴감에 사무쳤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는 일부러 내 상처를 헤집고 있는 것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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