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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나민준의 목소리였다. 나는 몸을 돌릴 생각도 없었다. 고서준과 엮이고 싶지 않은 만큼 나민준과도 엮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민준은 나의 곁으로 걸어왔다. 팔짱을 낀 그는 연회장에 있을 때와 사뭇 다른 태도로 반말을 해댔다. “너 소문이랑 좀 다르다? 다들 고서준한테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애라고 하던데. 아까는 선을 긋는 것 같던데?” 그는 갑자기 훅 다가왔다. 그의 숨결은 나의 얼굴에 떨어졌다. “혹시 새 작전이야? 일명 밀당 대작전?” 나는 낯선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는데,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힘 있는 손이 어깨를 잡고 확 끌어당겼다. 뒤로 쓰러진 나는 익숙한 향이 나는 품에 안겼다. “떨어져.” 고서준의 말투에 냉기가 서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불쾌한 표정을 지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 대체 왜 불쾌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나는 온몸이 불편했다. “이거 놔.”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거리를 벌렸다. 고서준은 내가 먼저 물러설 줄 모른 듯 빤히 바라보다가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전에 이지현이 다가와서 팔짱을 꼈다. “서준아, 물 사러 간다면서 왜 여기 있어?” 말을 마친 이지현은 이제야 나를 발견한 듯 말했다. “어머, 수아 너도 있었네?” “... 응.” “잠깐, 너 설마 또 서준이를 스토킹했어?” 이지현은 나와 고서준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는 그의 팔을 흔들거리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서준아, 시간도 늦었는데 수아한테 뭐라고 하지 말자. 여자애 혼자 여기까지 쫓아온 것도 힘들었을 텐데.” 나는 당연히 반박하려고 했다. 그러나 차가운 안색의 나민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요. 루머를 퍼뜨리면 법적 책임을 지는 거 몰라요?” 나민준은 아주 다정한 인상의 사람이다. 그러나 속내는 언제나 차갑고 거리감이 있었다. 위선의 가면을 벗은 지금, 그는 고서준 못지않게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다. 1초 전까지만 해도 양의 탈을 쓰고 있다가, 탈을 벗어 던지고 사냥에 돌입한 모습이었다. 겁먹은 이지현은 고서준의 품으로 숨으며 울먹였다. “서준아, 저 사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못 알아듣겠어.” 고서준은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뻗어 더욱 꼭 끌어안았다. 의도는 아주 선명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사과해.” 나는 고서준이 이지현을 편애하는 모습을 아주 많이 봐왔다. 그런데도 상처는 번마다 똑같이 받았다. 그는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아주 잘 알았다. 오늘 밤의 연회는 우리 집안에서 개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지현이 헛소리하도록 내버려뒀다. 나는 이 개막장 싸움에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휩쓸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내가 왜 사과해야 해? 내가 누구한테 뭘 사과해야 하는데?”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똑바로 직시한 눈빛에는 도발이 섞여 있었다. 고서준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 주변의 공기도 함께 가라앉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내가 뺨을 맞고도 손 아프게 했다며 사과해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도로변까지 걸어갔을 때 고서준이 대뜸 걸어와서 손목을 잡았다. 고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언제 가도 된다고 했지?” “하, 내가 가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네가 뭔데 그것까지 허락받아야 하는데?” 나는 이제 고서준의 말을 있는 대로 듣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김수아!” 고서준은 나의 손목을 더욱 꽉 잡았다. 마음만 먹으면 부러뜨릴 힘이었다. “아까 했던 말 다시 한번 해 봐.” “고서준, 애가 아파하잖아.” 나민준이 걸어와서 나의 손을 빼냈다. 나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 그는 앞에 단단히 막아섰다. “꺼져.” 고서준은 손을 들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래라 저래라야?” 나민준은 그의 손을 뜯어내며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아니면 수아한테 물어봐. 꺼져야 하는 쪽이 어느 쪽인지.” 고서준의 시선은 나에게 향했다. 나도 당당하게 그의 시선에 맞섰다. 나는 차라리 내가 꺼지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이때 이지현이 달려와서 나민준의 손을 뜯어내려고 했다. “서준이 놔요! 이거 놓으라고요!” 그녀는 또 화난 눈빛으로 나를 죽어라 노려봤다. “김수아, 넌 왜 아무 말도 안 해? 두 사람 싸우고 있는 거 안 보여?”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빨간 자국이 남은 손목을 바라봤다. 나도 이제 더 이상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오늘 난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어. 개인적인 원한은 알아서 처리해. 죄 없는 사람 괴롭히지 말고.” 말을 마친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택시를 잡아 떠났다. ... 차에 오른 다음, 나는 끊임없이 뒤로 밀려나는 풍경을 바라봤다. 한 일 없이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환생한 다음 나는 많은 집념을 내려놓았다. 이번 생은 전생의 나에게 상처 줬던 사람과 멀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하지만 현실은 자꾸만 고서준과 이지현, 그리고 2년 후에 만나야 하는 나민준과 엮이게 했다. 나는 문득 겁이 났다. 이러다가 전생의 운명을 따르게 될까 봐서 말이다. 정서현이 데리러 나왔을 때 나의 상태는 아주 나빴다. 나의 안색을 보고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편히 쉬게 했다. 나는 감사 인사를 하고 샤워했다. 그리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억지로라도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미래가 어떻든, 나는 용감하게 맞설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에 연연할 건 없었다. 생각 정리를 끝내니 속은 훨씬 편해졌다. 5날만 지나면 수능시험이다. 지금은 모든 정력을 시험에 쏟아야 하는 때다. 전생의 나는 원하던 패션디자인 학과에 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꿈도 꼭 이룰 것이다. 이튿날. 나는 정서현과 한창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이때 정서현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녀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그녀가 짧게 대답만 하는 것을 듣고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신도 전부 수학 문제에 집중했다. 잠시 후 정서현이 핸드폰을 들고 걸어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자리에 앉더니 한참이나 펜을 들지 않았다. 고민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시험지를 내려놓고 풀린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묶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도 물었다. “누구 전화야? 왜 갑자기 얼빠져 있어?” 정서현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나는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말했다. “그냥 말해. 뭘 혼자 고민하는 건데.” “네가 말하라고 한 거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심호흡하며 입을 열었다. “고서준이 전화 왔어. 내 집 문 앞에서 널 기다리고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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