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고서준은 뒤로 기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어서 긴 눈초리를 볼 수 있었다. 차가운 분위기와 함께 잘생김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10년간 품고 있던 정은 하루아침에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순간 나의 심장은 또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문이 열린 소리를 들은 듯 고서준은 고개를 들었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그는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리 좋아하는 걸 그만둔다고 해도 척질 건 없었기에,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안녕, 너도 화장실 왔어?”
“...”
어리석은 질문에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다행히 고서준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와봐.”
“응? 무슨 일인데?”
고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약간 불쾌한 듯한 모습이었다.
“와보라고.”
“...”
나는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안전거리는 계속 유지했다.
고서준은 어두운 안색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나한테 던져줬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나는 받아 들지 못 할 뻔했다.
“이게 뭐야?”
고서준은 대답 없이 거리만 좁혔다. 예고 없이 코끝을 스친 시원한 향기에 나는 머릿속이 창백해졌다.
“김수아, 공부 열심히 해.”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나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
내가 넋이 나가 있을 때 그는 이미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방에 돌아가자 정서현이 궁금한 듯 다가와서 물었다.
“그건 뭐야? 생일 선물이야?”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가방을 열어 본 정서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누가 문제집을 선물로 줬어? 이거 다 풀면 수능 만점 받는 거 아니야?”
“하하...”
7년 전으로 돌아가도 고서준의 속셈은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같은 대학교에 붙어서 시끄럽게 얽히는 건 그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주말은 빠르게 흘러갔다. 학교에서는 전교 50등에 든 학생의 성적을 게시하기로 했다.월요일, 등교하자마자 성적을 확인하려는 학생들이 그 앞에 우르르 몰려 있었다.
나도 정서현을 따라 성적을 확인하러 갔다.
“김수아 넌 왜 왔어? 이거 전교 50등 성적이야. 500등이 아니라.”
재수 없게도 이지현과 친구들이 마침 그곳에 있었다. 나는 눈을 뒤집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 고서준한테 사정사정해서 생일파티에 데려갔다며? 근데 서준이는 말 한마디 없이 먼저 가버렸다더라? 불쌍해서 어떡해.”
“그게 그렇게 질투 났어? 너도 고서준 좋아해?”
그녀는 눈에 띄게 멈칫하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이지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지현이 대신 말하는 거야!”
“아하. 주인 대신 총대를 메는 거구나.”
“야!”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지현은 이제야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친구 사이에 그렇게 말하는 게 어디 있어?”
전생의 나는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겪었다. 내가 고서준과 한 번이라도 만나는 한, 꼭 찾아와서 비꼬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말없이 참았다. 고서준이 불쾌해할까 봐서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좋게 말하면 못 알아들으니까 그러지.”
이지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반격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잠깐 침묵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못 했네. 그날 나도 서준이랑 같이 가려고 했는데, 급한 일이 있어서 혼자 보냈거든.”
이지현은 자신이 고서준의 여자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그녀의 친구들도 득의양양해서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전생의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결혼한 후 이지현과 다정하게 통화하던 고서준의 목소리, 주변 사람이 수군대는 목소리, 시댁의 적나라한 비교, 결혼기념일에 떠나던 고서준의 뒷모습...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수도 없이 다잡았던 멘탈이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아야.”
정서현이 나의 손을 잡았다. 내 안색이 창백해진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자 이지현의 친구들은 이 기회를 빌려 나를 비웃기 시작했다.
“이만 꺼지시지. 괜히 성적 보고 더 충격받지 말고.”
“전교 50등도 안 되면서 경성대에 간다는 게 말이 돼?”
정서현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 입 다물지 못해?!”
나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이지현의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봤다. 승자가 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순간 나는 정신이 후다닥 들었다. 화를 내려는 정서현의 손을 잡은 나는 성적표를 들고 걸어오는 선생님을 가리켰다.
“정신 나간 애들 상종하지 말고 성적이나 확인하자.”
“지X하네!”
여자애들은 끝까지 나를 비꼬려고 했다.
“얘들아, 조금만 비켜줘!”
선생님이 성적표를 게시했다. 여자애들은 대충 한 번 훑고 나서 비웃기 시작했다.
“김수아 이름은 없네?”
“하하, 그러니까! 그러면서 뭐, 성적을 확인하겠다고?”
이지현도 입꼬리를 올렸다.
“눈깔은 장식이냐?”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정서현이 눈을 반짝이면서 어딘가를 가리켰다.
“눈 똑바로 뜨고 잘 봐! 김수아, 28등!”
나의 이름은 중간쯤에 있었다. 확실히 보아내기 어려운 자리였다.
정서현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수아야, 수학은 어떻게 만점 받은 거야? 영어도 만점이야!”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전생의 나는 목숨 걸고 경성대에 붙었다. 원래는 행복한 인생의 시작이 될 줄 알았는데, 결혼한 다음에는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집안사람에게 잘 보이는 방법도 가정교사 노릇밖에 없었다.
덕분에 나는 결혼한 다음에도 공부를 놓지 않았다. 학원을 꾸려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대신 국어를 너무 오래 공부하지 않아서 약간 떨어지는 편이었다.
이지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참이나 바라봤다. 부드러운 척하는 표정도 자칫 흐트러질 뻔했다. 그녀의 친구들도 하나같이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의 표정을 감상했다.
“방금 뭐라고? 잘 못 들었는데 다시 말해 볼래?”
조금 전 말한 여자애는 빨개진 얼굴로 어쩔 바를 몰랐다. 덕분에 나도 속이 훨씬 후련해졌다.
나는 또 이지현을 바라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이지현, 난 너랑 네 친구들이 너무 싫어. 그러니까 자꾸 치근덕대지 말아 줄래?”
짜증이 날 대로 났던 나는 말을 돌려서 하지도 않았다. 내가 대놓고 이런 말을 할 줄은 모른 듯, 이지현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정서현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아야...”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나는 고개를 돌려서 언제부턴가 가까이에 서 있던 고서준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