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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어느 저녁. 고요한 공간에서 고서준의 뜨거운 입술이 나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그를 꼭 끌어안은 나는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취기가 오르면서 호흡은 점점 가빠졌다. 그의 움직임에도 다급함이 묻어났다. 분위기가 한창 달아오를 때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서준아...” 띠리링. 귀를 찌르는 벨 소리가 분위기를 깼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서 핸드폰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지현’ 순간 질식감이 밀려왔다. 어둠 속에서 나는 고서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주저하고 있다는 것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디에서 온 용기인지, 나는 고개를 들어 입을 맞추려고 했다. 그러나 고서준은 고민 없이 몸을 일으켜 받기 버튼을 눌렀다. 전화 건너편에서 여자의 교태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고서준은 조명을 켤 새도 없이 창가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이다. 열정이 식고 나의 마음은 점점 차가워졌다. 서러움도 금방 절망으로 변했다. 잠시 후 고서준이 전화를 끊었다. 탁! 눈부신 조명이 켜지고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에도 냉기가 서려 있었다. “너 오후에 지현이 전화를 받았어?” 확신에 찬 질문이었다. 나는 잠깐 침묵에 잠겼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전화를 받고 기록까지 지워버렸어. 그리고 일부러 널 취하게 만들어 놓고 이지현이 돌아오는 걸 모르게 했어.” 고서준은 화가 난 듯 나를 노려봤다. 그러나 곧 아무 말도 없이 옷을 입고 나가려고 했다. “고서준!” 나는 이불을 꽉 잡으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이야. 굳이 오늘 네 전여친을 만나러 가야겠어?” 고서준은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급한 일이 있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는데 다음은 없어. 내 핸드폰에 손대지 마.” 이지현도 그가 필요하겠지만 나도 필요했다. 몸을 흠칫 떤 나는 절망에 겨워 말했다. “지금 나가버리면 나 이혼할 거야.” 고서준은 어두운 안색으로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마음대로 해.” 문은 쾅 하고 닫혔다. 나는 힘없이 침대에 쓰러져서 눈물을 흘렸다. 억지로 한 결혼에는 결국 사형 판결이 나고 말았다. 벽에 걸린 웨딩사진을 보며, 나는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이 침실에 1초라도 더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비척비척 나가서 차를 몰고 외출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전에 다니던 고등학교에 와 있었다. 밖에는 우수 졸업반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나는 갖은 수를 써서 고서준의 곁에 꼭 붙어 섰지만, 사진이 찍힌 순간 그의 시선은 다른 여자에게 향해 있었다. 결말은 이때부터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고서준을 좋아했다. 그는 얼굴도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집안까지 훌륭한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접근하기 위해 나는 의도적인 우연을 매일 만들어냈다. 그리고 밤낮 없이 공부하며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에게는 추호의 관심도 없었다. 대학교에서 고서준은 이지현과 만나기 시작했다. 나는 대성통곡 한 번 하고 나서 포기하기를 선택했다. 졸업할 때쯤이 되어서 고서준 집안의 기정그룹이 위기에 빠졌다.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고 이지현은 유학을 떠났다. 고서준이 가장 힘든 시기 나는 유학도 포기한 채 기정그룹의 위기를 도와줬다. 고서준의 아버지도 내 가족처럼 간호해 줬다. 상황이 진정된 다음 고서준은 나에게 갖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다. 그를 수년간 좋아했던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말했다. “너랑 결혼하고 싶어.” 나는 결국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고서준의 마음은 한 번도 나에게 있었던 적이 없다. 지난 3년 내내, 그의 태도는 한결같이 차가웠다. 모든 외면이 나의 비열한 수단에 대한 벌인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부부가 됐으니, 언젠가는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만 노력하면 말이다. 그러나 이제 이지현이 돌아왔다. 내가 지금껏 한 모든 노력이 이지현의 전화 한 통보다 못했다. 띵. 띵. 띵. 핸드폰은 메시지로 인해 끊임없이 울려댔다. [나 병원에서 이지현이랑 고서준 봤어!] [둘이 다시 만나는 거임?] [당연히 다시 만나야지! 학교 다닐 때도 제일 보기 좋은 커플이었잖아!] [근데 고서준 결혼하지 않았나?] [여우 같은 년이랑 결혼했다는 말 들었어. 그것도 집착을 못 이겨서. 이미 이혼하지 않았을까?] 학교 단톡방에 올라온 소식은 비수가 되어서 나의 가슴을 찔렀다. 나는 서서히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고서준은 좋아하던 사람과 다시 만났다. 그러나 나는 한낱 가정주부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여우 같은 년이라고 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나의 사랑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 만약 내가 고서준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조금 달라졌을까? 이때 눈 부신 빛이 나의 시선을 자극했다. 도로 한복판에는 갑자기 검은색 실루엣이 나타났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핸들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차는 통제를 잃고 빙빙 돌았다. 쾅! 거대한 충격에 이명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곁에서는 말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나는 머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시끄러워요.” 그 순간 모든 목소리가 사라졌다. 나는 갑자기 홀가분해진 몸으로 눈을 떴다. 앞에는 고서준의 차가운 눈빛이 보였다. 익숙하고도 낯선 모습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서준아...” 나의 기억은 아직도 길고양이를 피해 절벽에서 떨어진 순간에 멈춰 있었다. ‘나 살아 있는 건가?’ 고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차가운 목소리에 나는 흠칫 떨었다. 고서준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도 차갑기는 여전했지만 앳된 느낌이 남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서준이잖아?’ 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는 강당의 무대에 서 있었고 아래에는 수많은 학생이 모여 있었다. 곁에는 어두운 안색의 교장이 있었고 뒤에는 ‘경성대학교 부속 고등학교 백일 결의대회’라는 글이 보였다. 나는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러자 통증에 몸이 흠칫 떨렸다. ‘꿈이 아닌데? 나 지금 환생한 건가?’ 그렇다. 나는 7년 전으로, 정확히는 수능시험 100일 전으로 환생했다. 이날은 나의 18살 생일이었다. 고서준의 얼굴에는 짜증과 거리감이 보였다. 그러나 결혼 후의 냉정함은 없었다. 내가 말이 없는 것을 보고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김수아, 지금 학교 행사 중이야. 수험생을 위한 결의대회 중이라고. 뭐가 됐든 시험은 끝나고 얘기해야 할 거 아니야.” 익숙한 대사에 나는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자신을 위한 생일 선물로, 결의대회에 고서준에게 공개 고백을 했다. 깜짝 놀란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손에 들고 있는 마이크에서는 귀를 찌르는 소리가 났다. 고서준을 바라보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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