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내가 저금통장과 일부 명품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도우미 아줌마가 밥 먹으러 내려오라고 했다.
나는 물건을 내려놓고 1층으로 내려갔다.
2층에 있는 동안 나민준이 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치 집주인처럼 식탁 상석에 앉아있을 줄 몰랐다.
진짜 집주인인 아빠는 그 옆에 앉아있었었다.
평소에는 김수연과 나의 앞에서 그렇게 어른을 존경해야 한다고 하더니,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때 아빠가 나를 불렀다.
“수아야, 얼른 와. 도련님이랑 이야기하고 있어. 나는 젊은이들 대화에 끼지를 못하겠어.”
계단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나는 아빠를 향해 핸드폰을 흔들면서 입 모양으로 액수를 요구했다.
다음 순간, 바로 계좌이체 문자가 뜨는 것이다.
천천히 주방으로 걸어가면서 액수를 확인해 보니 천만 원이었다.
나는 입을 삐쭉거리면서 뒷짐을 쥐고 발걸음을 멈췄다.
“김 대표님께서 주신 금액이 조금 모자란 것 같은데요? 아님...”
나는 일부러 나민준을 힐끔거렸다.
눈치가 빠른 나민준은 나랑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가 김정태와 무슨 암호를 주고받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피식 웃더니 자세를 고쳐잡고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김 대표님께서 수아 씨 용돈을 안 주셨어요?”
김정태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도련님, 오해예요. 이번 달은 바빠서 두 날 늦게 용돈 준 걸 가지고 저렇게 삐져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일단 와서 밥부터 먹어. 이따 이모한테 2천만 원을 더 보내주라고 할게.”
나는 이 식사 한 끼가 이렇게도 값진 식사인 줄 모르고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러다 머리를 굴려 액수를 높여보려고 했다.
“아빠. 2천만 원으로는 부족해요. 수능 끝나면 친구들이랑 여행 가기로 했단 말이에요. 입학 통지서가 내려오면 참석할 축하 파티도 많을 텐데 용돈 좀 올려주세요.”
김정태가 이를 꽉 깨물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얼마를 원하는데?”
나는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1억 원이요.”
김정태는 어두운 표정으로 마지못해 알겠다고 했다.
“얼른 밥부터 먹어.”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자리에 앉기 전 한마디 덧붙였다.
“아빠, 그리고 밀키웨이 옷을 다섯 세트 선물해 주기로 했잖아요.”
“그래.”
김정태는 할 말을 잃었고 나는 기쁘기만 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는 나민준도 아까처럼 꼴보기 싫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에 앉자마자 차돌박이 된장국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왜 국을 안 마셔요? 저희 집밥이 입에 안 맞으세요?”
나민준은 흐뭇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다치지도 않은 된장국을 쳐다보았다.
“국을 마시다 구경거리를 놓칠까 봐 그래.”
된장국을 한 숟가락 마셨더니 맛이 좋았다.
호박도 싱싱했고, 차돌박이 느끼함도 적당한 것이 아주 맛났다.
“그러면 마시지 마세요.”
나는 아줌마더러 나민준 앞에 놓여있는 국그릇을 치워달라고 하면서 생수를 권했다.
우리 둘 사이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지 김정태는 이미영과 수군거리고 있었고, 입 모양으로 나민준이 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제야 조용해졌다.
김수연한테 겁줬더니 아무도 식사 자리를 방해하는 사람이 없이 순조롭기만 했다.
점심 식사 후, 나민준은 잠깐 앉아서 휴식하기로 했다.
그한테 무슨 여유시간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지만 나는 금방 김정태한테서 돈까지 뜯어내고 바로 자리를 비우긴 힘들었다.
나는 거실에서 이들의 대화 내용을 듣고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만 같았다.
나씨 가문에서 김정태한테 준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되었고, 욕심 많은 김정태가 또 나씨 가문의 또 다른 건물 개발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이 부분은 김 대표님께서 직접 저희 회사 책임자랑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일이 있어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민준이 나를 힐끔 보면서 말했다.
“수아 씨, 나 배웅 좀 해줘.”
나는 나민준과 김정태를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씨 가문에 별로 돈 없던 나의 어린 시절, 김정태는 실의에 빠진 사업자한테서 지금 살고있는 집을 구매했었다.
이 집은 한가지 특점이 있었다. 면적이 넓었지만 조경 디자인이 60 프로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나민준은 기사더러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했고, 나는 그와 함께 꽃길을 따라 밖으로 향했다.
“수아 씨는 참 재밌는 사람인 것 같아.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래?”
아까 걸어오면서 꺾은 풀잎 향에 빠져있을 때,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나민준 여자친구? 정말 웃겨.’
내 기억이 맞다면 전생에 이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아차린 그날, 나한테 이런 말을 했었다.
“사실 난 수아 씨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어. 남편 사랑도 못 받고, 엄마 아빠한테 이용이나 당하고, 친구한테마저 배신당하고. 그런데 지금 보니까 쌤통이라는 생각이 드네. 나 사실 후회하고 있어. 서준 씨한테 버려진 쓰레기인 걸 알았으면 시간을 낭비하면서까지 수아 씨한테 접근하지도 않았어.”
나민준은 피식 웃으면서 이런 말까지 했었다.
“수아 씨는 내 친구가 될 자격도 없어.”
전생에는 친구가 될 자격도 없다더니, 이번 생에는 여자친구가 되어달라고?
내 반응에 나민준은 잠깐 멍때리더니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왜. 난 수아 씨 남자 친구 할 자격도 없어?”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할수록 웃겨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나민준은 내가 웃는 모습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그가 폭발하기 직전에 웃음을 멈춘 나는 풀잎을 던지고 그를 쳐다보면서 평온하게 말했다.
“나민준 씨가 서준이랑 라이벌이라는 거 알아요. 저희 아빠한테 프로젝트를 선물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똑똑히 말씀드릴게요. 이 일은 나민준 씨와 아빠 사이의 일이지 저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맑고 개였던 하늘에는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왔고, 벚꽃이 만개한 벚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 들어 구름이 덮인 하늘을 보고, 또 내 말로 인해 표정이 어두워진 나민준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는 서준이랑 이미 끝난 사이예요. 앞으로 만나고도 싶지 않고 엮이는 일도 없었으면 해요. 나민준 씨도 똑같아요.”
나는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 집으로 들어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나민준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저번 생에는 나한테 상처만 주던 사람들이라 이번 생에는 멀리하고 싶었지만 왜 자꾸 내 앞에 나타나 내 심기를 건드는지 몰랐다.
그러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설마 저 사람들 눈에는 나는 그저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또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그런 멍청이로 보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