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협박
“서태윤, 내 말 잘 들어. 일주일 안으로 손자며느리를 데려와! 아니면 맞선 보러 내보낼 테니까.”
1단계는 바로 당근과 채찍이다.
“할머니가 죽는 꼴을 봐야 속이 후련해? 미련만 남긴 채 이 세상을 떠나 네 부모님과 할아버지를 저승에서 만나서 참회하게?”
2단계는 목숨을 건 협박이다.
서태윤이 황당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 억지 부리지 마세요.”
김말숙은 콧방귀를 뀌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서 뭐? 하여튼 알아서 해.”
결국 두 손 두 발을 든 서태윤은 타협을 선택했다.
“알았어요. 금방 찾아서 데려올게요.”
3단계는 다름 아닌 체크메이트이다.
김말숙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보탰다.
“일주일밖에 없다는 거 잊지 마.”
서태윤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얼굴로 할머니의 방을 나갔다.
그가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이철웅이 말을 꺼냈다.
“어르신, 도련님을 몰아붙였다가 진짜 화가 나면 어떡해요?”
김말숙의 얼굴에 웃음기가 점차 사라졌고, 온갖 풍파를 겪은 듯한 눈동자에 애잔함이 아른거렸다.
“태윤은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혼자 자랐어. 나중에 우리 남편이 돌아가고 나서 친척 어른들이 겉으로는 공손해 보여도 실상은 호시탐탐 녀석의 자리를 노리고 있거든. 내가 유난히 결혼을 서두르는 것도 태윤이가 하루빨리 가정을 꾸려 가문의 핏줄을 이어가길 바라서란다.”
김말숙의 목소리에 무력감과 씁쓸함이 묻어났다.
집에서 나온 서태윤을 발견하자 검은색 마이바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원우가 즉시 뒷좌석 문을 열었다.
“대표님.”
서태윤은 그의 앞에 멈춰 서서 지시했다.
“어젯밤에 만난 여자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조사해줘.”
배원우가 대답했다.
“네.”
서태윤이 허리를 굽혀 차에 올라탔고, 곧이어 문이 닫혔다.
배원우는 재빨리 조수석에 앉았다.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엔진 소리와 함께 차는 서씨 가문 본가를 유유히 벗어났다.
...
호텔에서 나온 임다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피임약을 사기 위해 약국에 가는 것이었다.
서태윤에게 결혼을 거절당한 이상 굳이 연결 고리를 만들 필요 없었다.
그는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본인도 이득인지라 어젯밤은 단지 해프닝으로 여기면 그만이었다.
임다인은 길가에서 택시를 세우고 곧장 진성 그룹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어젯밤 그랜드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내 눈을 감고 연신 심호흡했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티 없이 깨끗했고 표정은 결연했다.
임다인은 미소를 짓고 또각또각 걸어가 진성 그룹 로비에 들어선 다음 프런트 데스크를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제인 그룹 관리팀 임다인이라고 해요. 안범희 부대표님을 뵙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프런트 직원이 고개를 들어 위아래로 훑었다.
“임다인이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시종일관 예의 바르면서도 사무적인 웃음을 유지했다.
대답을 듣는 순간 프런트 직원의 안색이 돌변하더니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다.
“죄송하지만 부대표님께서 손님은 받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다인은 손에 든 핸드백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진지하고 겸손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사과드리러 왔다고 말씀 한 번 해주면 안 될까요?”
프런트 직원은 그녀를 가뿐히 무시했다.
임다인은 계속해서 굽실거리며 말했다.
“부탁드릴게요. 급한 일이 있다고 꼭 좀 전해주세요.”
프런트 직원도 그제야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부대표님 비서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곧이어 인터폰으로 전화를 걸었고, 짧은 대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직원은 그녀에게 통화 내용을 전달했다.
“임다인 씨, 비서님이 말씀하길 부대표님께서 현재 바쁘신 관계로 잠시 대기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하네요.”
임다인은 속으로 뻔했다. 안범희는 어젯밤에 얻어맞은 일 때문에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비서한테 이런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울며 겨자 먹기로 순응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내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고 뒤돌아서 대기실 소파에 앉았다.
한 시간 뒤, 안범희의 비서가 내려왔다.
“임다인 씨, 오늘 부대표님께서 스케줄이 꽉 차서 만나 뵐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다만 진심으로 사과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 밤 에덴 클럽 888번 방에서 임다인 씨를 기다리겠다고 하네요.”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임다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안범희의 비서가 말을 보탰다.
“그리고 제인 그룹에서 신사동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서는 진정성과 각오를 보여줘야 할 것 같다고 했어요.”
임다인은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미소를 쥐어 짜냈다.
“네, 알겠습니다.”
만약 신사동 프로젝트가 물 건너간다면 부모님의 유품을 되찾을 방법이 없다.
하지만 오늘 밤 에덴 클럽에 가면 안범희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힘들 텐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정말 그 쓰레기 같은 놈과 끝장이라도 봐야 하는 걸까?
결국 임다인은 무거운 마음으로 진성 그룹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