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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다른 보상은 필요 없어

임다인은 잽싸게 움직였다. 어제 입었던 옷을 주섬주섬 집어 들고 욱신거리는 두 다리를 힘겹게 내디디며 샤워하러 욕실로 엉기적엉기적 걸어갔다. 잠시 후 욕실에서 나올 때 다급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침대로 다가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큰어머니]라는 글자가 떴다. 이는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임다인은 심호흡하더니 통화 버튼을 누른 다음 귀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휴대폰 너머로 분노와 비난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빌어먹을 계집애야! 어젯밤에 무슨 짓을 한 거니? 일 얘기하러 보냈더니 감히 안범희한테 손찌검이나 해?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어? 부대표님을 건드리면 큰코다치는 거 몰라? 죽고 싶으면 혼자 곱게 죽던가, 괜히 우리랑 제인 그룹까지 끌어들이지 마. 똑똑히 들어! 오늘 중으로 사죄하러 찾아가서 회사의 손실을 만회하지 않으면 네 부모님 유물은 영원히 물 건너갈 줄 알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다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화를 참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알겠어요.” “혹시라도 일을 망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상대방이 전화를 뚝 끊었다. 임다인은 휴대폰을 꼭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가자 뼈마디가 하얗게 변할 지경이었다. 곧이어 감정을 추스르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눌렀다. 하루빨리 보이지 않는 속박에서 벗어나야 했고 더 이상 휘둘려서는 안 되었다. 큰어머니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제인 그룹 이사회의 합류가 시급했고, 할아버지가 남긴 회사 지분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지분을 얻으려면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결혼할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결혼이라.’ 이때, 그녀의 머릿속에 당돌한 생각이 떠올랐다. 임다인은 입술을 깨물고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안방에서 걸어 나갔다. 하지만 서태윤을 마주치는 순간 굳은 다짐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거실 소파 정중앙에 긴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의 여유로운 모습 속에서 왠지 모르게 위압감이 느껴졌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걸쳐져 있었고, 왼손 손가락 사이에 낀 시가가 천천히 타들어 가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남자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특유의 분위기로 주변을 압도했고 마치 온 세상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지배당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태윤 씨...” 임다인이 입을 열자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서태윤은 기다리다 못해 짜증 난 기색이 역력했다. 곧이어 입으로 하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고, 심연 같은 눈동자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사이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임다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국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남자가 문득 말했다. “앉아.” 비록 한 마디에 불과했지만 차마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임다인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마지못해 서태윤의 오른편에 있는 1인용 소파로 걸어가 쭈뼛쭈뼛 앉았다. 공기 중에 떠도는 짙은 담배 냄새 때문에 숨이 쉬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연신 했다. 무심한 얼굴로 힐긋 쳐다보던 서태윤이 태연하게 손에 든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끄자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이내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은 내가 실수한 게 사실이니 원하는 보상이 있으면 말만 해.” 임다인은 무릎 위에 놓은 손을 서서히 움켜쥐며 치맛자락을 꼭 붙잡았다. “전...” 그리고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서태윤은 재촉하는 대신 그녀가 조건을 제시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임다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수치스러운 마음에 망설여졌지만 그나마 얼굴을 가린 옆머리 덕분에 티가 덜 났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머릿속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결혼하고 싶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태윤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은 느낌이고 왠지 모르게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택권은 없었기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 한 마리의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했다. “제가 원하는 보상은 태윤 씨와 결혼하는 거예요.” 서태윤이 피식 비웃었다. “뽕이라도 뽑겠다는 건가?” 누가 봐도 비아냥거리는 말투였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임다인은 초조한 나머지 침을 꼴깍 삼켰고,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도 덩달아 힘이 들어갔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만 하라고 한 사람은 태윤 씨예요.” “물론 보상에 결혼은 제외였어.” 서태윤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임다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어렵게 긁어모은 용기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결국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은 결혼을 제외하고 다른 보상은 딱히 원하지 않아요.” 서태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고 밤하늘처럼 새까만 눈동자로 앞에 있는 여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마치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숨겨진 진짜 의도를 캐내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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