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안가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시선이 안시연의 작은 배로 향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딸, 어쩌다가?”
안시연은 시큰거리는 코끝을 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 됐어요.”
안가인이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와. 엄마가 안아줄게.”
“엄마.”
안시연은 그녀를 부르며 엄마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안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딸의 등을 손으로 살며시 토닥였다.
그제야 예쁘게 키운 딸이 이젠 등 뒤로 뼈가 만져질 정도로 앙상하게 말랐다는 걸 알았다.
안가인은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겨 체취를 맡으며 안시연은 안정을 되찾아갔다.
억울하게 아르바이트에서 해고당한 서러움, 임신 후 혼란스러웠던 마음과 밥 먹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억울함을 전부 토해냈다.
자리에 앉은 안시연은 아직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화 안 났어요?”
안가인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네가 생겼다는 걸 알았을 때 너무 행복했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기를 품고 금성까지 가서 너를 낳았지. 네가 있어서 엄마는 하루하루가 꿀처럼 달콤했어.”
“엄마...”
안시연이 간만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애교를 부렸다.
“그러니까 말해봐. 어쩌다 임신한 거야? 이 병실은 또 뭐고. 언제 VIP 병실로 옮겼어?”
안시연은 이 모든 걸 설명하기 어렵고 애교로 넘어갈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애초에 2억을 받았던 것부터 그녀는 거짓말했다.
금성 학교에서 줬던 집을 매각했고 집을 산 사람이 엄마의 사정을 알고 가격을 흥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안시연은 입술을 달싹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두 달 전에 한 사람과 하룻밤을 보냈어요.”
“나쁜 사람 만났어?”
안가인은 불안하고 괴로운 표정으로 딸의 뺨과 목을 살피며 물었다.
“아니요. 제가 원해서 한 거예요.”
안시연은 엄마가 걱정하는 걸 알았는지 재빨리 설명했다.
“그 남자와 오늘 오전에 혼인신고를 했고 이 병실도 그 남자가 마련해준 거예요. 그게 잘못이라는 건 알아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아서 나도 아이를 지우려고 했지만 그 사람이 갑자기 혼인신고를 하겠다고 하니까 아이를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안시연은 엄마가 괜한 생각을 하며 치료받는 걸 거부할까 봐 병원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 딸, 잘했네. 엄마는 화 안 나.”
안가인이 그녀를 달랬다.
“네가 이 일을 말하기 전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속으로 고민했을지 엄마는 잘 알아. 네가 먼저 말해줘서 엄마는 기뻐.”
딸이 자신을 생각해 지금까지 숨겼다는 걸 안가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엔 너무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 하얀 거짓말을 한 거다.
수능에서 딱 8점 깎이고 수석이 된 딸은 전도가 유망했다.
갑작스러운 자신의 병마만 아니었다면 딸은 아름답고 자유로우며 행복한 대학 생활을 보냈을 거다.
교직원 기숙사는 팔려도 기껏해야 1억2천 정도 되고 그녀와 딸의 공동 소유였다. 자신이 사인하지 않았는데 그 집이 팔릴 수가 없었다.
단순한 딸은 엄마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평범한 대학생이라면 어떻게 의자에 앉아서도 잠이 들 만큼 피곤하겠나.
분명 아르바이트하는 거다.
어렸을 때부터 곱게 자라서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은 딸인데 이젠 자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되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런 딸을 어떻게 원망할까. 탓하려면 하필 지금 아픈 자신을 탓해야 했다.
이기적인 자신이 하루라도 더 딸 곁에서 살아가려는 욕심을 원망해야 했다.
그녀가 살아있는 한 딸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딸의 등골을 휘게 만드는 짓인데 누가 그녀를 VIP 병실로 옮겨줬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이름을 바꾸고 23년이 지나 외모도 바뀐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엄마.”
안시연은 엄마의 말을 듣고 또다시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달싹였다.
“저 정말 걱정했어요. 엄마가 화가 나서 나 혼자 버려둘까 봐.”
“엄마도 이해해. 괜찮아, 앞으로 살아갈 날만 생각해야지.”
안가인은 딸의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너랑 결혼한 사람은 이름이 뭐야? 얼굴은 어떻게 생겼어?”
‘이름이 뭐였더라?’
안시연은 생각나지 않았다.
혼인신고 할 때 청장도 그를 대표님이라고 불렀고 그녀도 줄곧 대표님이라고만 부르며 이름이 뭔지도 몰랐다.
혼인신고까지 했는데 상대의 이름도 모르다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안시연은 에코백을 뒤적여 혼인 관계 증명서를 꺼내 안가인에게 내밀었다.
이름 박성준, 나이 28살.
이름과 나이로 비추어 볼 때 그 아이가 맞았다.
안가인은 조용히 둘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 두 사람은 웃고 있지 않았다.
단발머리 딸아이는 영롱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의아한 표정이었고, 박성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잘생기고 귀티 나는 얼굴을 드러낸 채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였다.
박성준의 얼굴을 보며 안가인은 친구 서연수의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얘도 참 불쌍하지.’
이제 막 세상을 알아갈 때쯤 제일 먼저 아이의 뇌리에 박힌 건 엄마가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울부짖는 모습이었다.
‘서연수,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 왔네.’
두 아이가 결혼했다.
과거 농담처럼 주고받던 말이 현실이 된 거다.
운명은 때때로 이미 예정되어 있기라도 하듯 참 신기했다.
절친한 친구를 생각하며 안가인은 눈시울이 붉어졌고 안시연은 아무 반응 없는 엄마를 불렀다.
“엄마?”
“아니야, 엄마 행복해서 그래.”
안가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 사람 같네.”
“좋은 사람이에요.”
안시연은 양심에 찔리는 칭찬을 했다.
“여러모로 잘 챙겨줘요.”
안가인이 딸에게 혼인 관계 증명서를 돌려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앞만 보면서 살아. 이미 일어난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고.”
“네.”
안가인은 손을 뻗어 딸의 배를 어루만지려다 아픈 자신을 생각하며 딸의 손을 잡는 것으로 대신했다.
“두 달이 지났는데 불편한 데는 없어?”
“아직은 없어요.”
“임신했으면 튼살 방지 오일을 사서 발라. 배가 부를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부터 발라야 해. 그리고...”
안가인은 어제보다 기분이 좋은지 말도 많이 했다.
그녀는 임신 중 주의해야 할 점부터 출산 후 몸조리 방법까지 하나하나 안시연에게 설명해 주었다.
비로 그 남자... 박성준이 전문가를 데려왔지만 안시연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침대 옆에 앉아 엄마의 말을 수첩에 꼼꼼히 적어 내려갔다.
안시연이 가기 전 안가인은 전에 빼놓은 옥팔찌를 옥 펜던트를 건네며 당부했다.
“이건 외할머니가 엄마한테 준 건데 이제 엄마가 너한테 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두 가지는 절대 팔면 안 돼, 알았지?”
안시연은 손에 쥔 옥의 서늘함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병동에서 걸어 나오는 안시연은 엄마에게 다 털어놓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전희진이 퇴근할 때쯤 그녀에게도 연락해 모든 걸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안시연이 식사 시간에 맞춰 벨리 가든으로 돌아오니 최미숙이 일찌감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모님, 어르신께서 오늘 처음 오신 날이니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온 가족? 누가 있어요?”
“어르신, 도련님, 사모님이요.”
기억을 더듬어 안시연은 송도원으로 찾아갔다.
박성준과 박현석은 이미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박현석이 화가 난 듯 얼굴이 상기된 채 손을 허공에 마구 흔들자 안시연은 걸음을 멈추고 더 다가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