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기성, 병원 응급실.
소독약 냄새가 콧속을 가득 채우자 안시연이 비몽사몽 깨어났다.
다른 침대에서 환자의 약을 갈던 간호사가 안시연이 깨어난 것을 보고 다가왔다.
“안시연 씨, 불편한 데 있어요?”
“아니요.”
“요즘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임신하셨어요.”
안시연은 곧바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임신이요?”
간호사가 놀리듯 물었다.
“생리 안 했는데 몰랐어요?”
“전...”
안시연은 머뭇거리며 생리를 피한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간호사가 테이블로 가서 종이 더미를 가져와 손에 던져주며 말했다.
“진료 기록과 진료비 청구서니까 스캔해서 결제하고 가시면 돼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안시연은 청구서와 진단서를 자세히 살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서둘러 스캔해 금액을 납부했다.
응급실을 나온 그녀는 또다시 결근으로 처리되어 월급이 삭감될까 봐 당황하며 카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점장이 메시지를 보내긴 했는데...
[안시연, 더 이상 알바 나올 필요 없어. 이번엔 기절해서 쓰러지고 지난번엔 어머니가 응급상황이라고 갔잖아. 네가 가면 가게 알바생 혼자 어떻게 일해? 바쁘면 손님들한테 욕까지 먹는데. 아무도 너랑 같이 일하지 않겠다니까 이번 달 월급까지만 계산해서 보낼게.]
안시연은 입금된 월급 21만 6천 원을 보며 곧장 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점장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저 이 알바 정말 필요해요. 제발요.”
점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시연, 누구나 다 힘들어. 네가 개인적인 사정 처리하지 못한 탓이니까 부탁해도 소용없어.”
“점장님, 엄마가 간을 이식해야 해서 아르바이트가 꼭 필요해요. 정말 죄송하지만 저 혼자 일하고 교대하는 사람 쉬어도 되니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통화가 뚝 끊겼다.
무력감의 눈물이 순식간에 흘러나와 입술 위로 미끄러지며 마음이 차갑게 식는 동시에 입안에선 짠맛이 느껴졌다.
절친 전희진이 급히 달려왔다. 연락한 사람은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그저 안시연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갔다는 말만 전했다.
이 순간 안시연이 이를 악물고 울먹이는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본 그녀는 무척 당황했다.
“시연아, 괜찮아?”
안시연은 감히 전희진을 쳐다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희진아, 내가 포도 맛 음료 사줄게.”
안시연이 애써 웃었지만 누가 봐도 씁쓸한 미소였다.
음료?
전희진의 마음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너 왜 그래?”
전희진은 놀라서 안시연의 턱을 부여잡고 좌우를 살폈다.
안시연의 얼굴은 하얗고 피부는 깨끗했지만 눈 주위는 어둡고 눈동자는 칙칙했다.
영양실조와 수면 부족을 제외하고는 심각한 질병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 시간에 겨우 3,600원을 버는데 그건 음료 하나에 사라질 돈이었다.
안가인의 목숨이 달린 돈으로 음료를 사주겠다니, 안시연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안시연, 너 왜 그래?”
전희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너무 불안한 마음에 울기 직전이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혼자 짊어질 필요 없어. 나랑 우리 부모님도 있잖아.”
“그래서 음료나 마시자고. 어디 가서 천천히 얘기하자.”
“음료는 됐으니까 근처 공원으로 가자. 거긴 돈 안 내도 되잖아.”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안시연은 전희진의 배려를 너무 잘 알았다.
그녀의 강한 자존심을 지켜주는 거다.
몇천 원짜리 음료는 남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돈이지만 그녀에겐 무척 비쌌다.
그 돈은 엄마의 하루 간병비, 병실 사용료, 혹은 진통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남들은 아무 때나 주문할 수 있는 음료 한 잔이 그녀에게는 산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늦가을의 바람은 벌써 차가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면 금세 정신을 차리고 이성을 되찾게 했다.
햇볕에 앉아 있어도 안시연은 조금의 온기도 느낄 수 없었다.
“이것 봐.”
안시연은 진단서를 꺼내 전희진에게 건넸다.
그녀는 앙상한 나뭇가지와 노랗게 말라간 잔디밭을 보며 마음이 쓸쓸하기만 했다.
병자를 치료하고 생명을 살려야 할 의대생이 졸업도 하기 전에 사람의 생명을 등에 짊어지고 가야 하는 걸까.
전희진이 재빨리 진단서를 확인했다.
[임신.]
“너 임신했어?”
전희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매를 걷어붙이며 당장이라도 크게 한바탕 싸울 기세였다.
“어떤 놈이 너 괴롭혔어? 내가 죽여버릴 거야.”
안시연은 감동한 눈빛으로 전희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원해서 그런 거야.”
전희진의 거만함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조용히 안시연 옆에 앉아 그녀의 가녀린 몸을 꼭 껴안았다.
본인이 원해서 그랬다니 그녀가 아무리 날뛰어도 소용없었다.
“넌 생리 안 하니까 알 수도 없었겠네.”
전희진이 그녀를 위로했다.
“겨우 8주라니까 가능할 거야. 지금 바로 병원 찾아가자. 내가 같이 가줄게.”
“근데...”
안시연의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8주면 태아도 이미 심장이 있고 형체를 갖추고 있어.”
평소에는 잘 울지 않던 안시연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입술을 깨물어도 눈물과 콧물을 참을 수 없었다.
한 생명은 이 세상에 오지 말았어야 했고, 또 다른 생명은 지킬 수 없으니 그녀는 삶에 대해 참담함을 느꼈다.
전희진은 상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래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현실이 그러했다. 아픈 안가인의 치료엔 엄청난 돈이 필요하고 안시연은 졸업하려면 아직 4년이 남았다.
본인조차 먹여 살리기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아이를 키우겠나.
아이를 낳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전희진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창백한 안시연의 얼굴을 보며 어떠한 위로도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안시연을 도와줄 수가 없었기에 그저 힘들 때마다 그녀에게 품과 어깨를 내어줄 뿐이다.
“희진아, 난 사람을 살리기도 전에 죽이게 됐네.”
안시연은 견디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희진아, 난 분명히 열심히 사는데 왜 여전히 이렇게 힘들까? 나 너무 힘들어. 금성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땐 엄마도 아프지 않고 나도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됐었는데.”
그녀는 사춘기 때 의사로부터 평생 생리는 하지 않지만 생식 능력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토록 짧았던 그날 밤에 어떻게 단번에 당첨이 된 건지.
왜 피임약 한 알이, 소염 연고 하나가 그렇게도 비싼지.
그날 병원비를 지불하고 나니 그녀가 가지고 있던 돈으로는 겨우 소염 연고 하나 살 수 있었다.
날씨는 추웠고 공원엔 사람이 별로 없어 두 소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안시연이 울자 전희진도 따라 울었다.
띠리링-
의자 위에 두었던 안시연의 휴대폰이 울리며 발신자를 확인한 안시연은 눈물이 뚝 멈추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네, 선생님.”
“어머님 병원비가 부족해요. 3일 안에 납부하지 않으면 약을 중단할 수밖에 없어요.”
말이 끝나고 전화는 끊겼다.
안시연은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가슴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이 납작한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아가야, 미안해. 널 키울 형편이 안 돼. 다시 돌아가서 돈 많고 시간도 많은 부모님을 찾아가.’
“이모가 왜?”
전희진은 전화를 받은 후 생각에 잠긴 안시연의 표정에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안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희진아, 나 병원 갈 거야.”
“시연아, 금방 받은 월급 너한테 줄 테니까 부족한 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
안가인 앞에서 돈을 건네면 속상해할 게 분명하다.
“아니, 나한테도 있어.”
비밀번호를 입력하던 전희진의 손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한 듯 잠시 멈췄다.
안시연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이 고작 얼마인데 엄청난 안가인의 병원비를 부담한다는 걸까.
‘시연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안시연, 솔직히 말해봐. 어쩌다 임신한 거야?”
안시연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병원비.”
단 세 글자였지만 전희진은 바로 알아들었다.
나무라는 말이 입가에 차올랐지만 이내 혀를 깨물고 꾹 삼켰다.
돈이면 뭐든지 해야 하는 안시연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안시연을 도와준 것도 없는데 어떻게 그녀를 탓할 수 있겠나.
“그날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