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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서약피의 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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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현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김기태는 고개를 들어 좌측에 놓인 관을 바라봤다. 꽃으로 뒤덮인 관에서 갑자기 피범벅이 된 뭔가가 튀어나왔다. “저게 뭐지? 설마 손이야?” “아직 시신 못 찾았다고 하지 않았어?” 장례식장 분위기는 스산하게 돌변했다. 바로 이때 관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기어나와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아빠, 나 너무 아파요. 설마 죽은 거예요?” 인기척을 따라 고개를 돌린 김기태는 혼이 나가떨어져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피투성이된 시신은 관을 기어 나와 노수영에게 다가갔다. “아줌마, 나 너무 아파요. 은지가 내 손을 짓밟았어요.” “은지야, 왜 납치범을 시켜서 날 무참하게 때린 거야?” “악.” 노수영과 김은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고 김은지는 머리를 싸매고 현실을 부정했다. “엄마, 우리 지옥 18층에 영혼을 가뒀잖아요. 절대 나올 리가 없다면서요? 왜 갑자기 절 찾아온 거죠? 싫어. 저리 꺼져.” 김은지는 당황했는지 중요한 정보를 폭로했다. 그 반응을 본 김소연은 피식 웃고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놀란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은 자유롭게 움직이는 김소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지 씨, 설마 살아있었어요?” “네.” 김소연은 김은지에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손을 짓밟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족들은 절 죽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심지어 지옥 18층에 제 영혼을 가뒀다네요.” 사람들은 저마다 귀를 의심했다. 김소연은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붉히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죽으면 회사를 독차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유서? 난 그런 걸 남긴 적이 없는데 꽤 그럴듯하게 위조했더라? 회사랑 재산은 네가 가진다며?” “아빠, 설마 잊었어요? 열흘 전에 김은지랑 허정우가 납치범을 매수해서 절 깊은 산속으로 납치했잖아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려고 했는데 벌써 잊으신 건 아니죠?” 김기태는 김소연이 살아있는 걸 보고선 계획이 실패했다는 걸 깨달았다. 잔머리를 굴리던 그는 재빨리 달려가 김소연을 끌어안았다. “소연아, 살아있었구나. 정말 다행이야.” “아빠, 그리고 전 너무 억울해서 죽을 수가 없었어요.” 김소연은 치가 떨린다는 표정으로 허정우를 바라봤다. “결혼식 전에 동생이 남자친구랑 바람난 걸 알았는데 어떻게 편히 눈을 감겠어요?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참 눈물 겨운 사랑이죠?” 김은지와 허정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어디선가 몰려든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댔다. 김기태는 재빨리 경호원들에게 현장을 정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소연아, 혹시 머리를 다친 거니? 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지?” 눈치가 빨랐던 노수영도 김소연의 입을 막기 위해 눈물을 쥐어짜 내며 연기했다. “아줌마랑 아빠한테 화가 많이 났구나. 죽었다고 오해해서 미안해.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시신을 찾았는데 결국 못 찾았어. 아빠가 열흘 동안 눈물로 밤새운 건 알고 있니? 아무리 힘들어도 회사는 누군가 관리해야 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네가 예전에 작성한 유서를 꺼낼 수밖에 없었어.” “아빠랑 아줌마 우리 소연이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이제 그만 화 풀어.” 김기태는 자애로운 아버지로 돌변했다. 그들의 헛소리를 상대하기 귀찮았던 김소연은 노수영의 손을 뿌리치고 싸늘한 눈빛으로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훑어봤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와 취재진을 향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좋은 기사 부탁드릴게요.” 기자들은 김소연의 아름다운 외모에 매료되어 넋을 잃었다. “소연아.” 이때 정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에게 다가가던 김소연은 방금 루머를 퍼뜨린 여직원을 힐끗 보고선 뺨을 내리쳤다. “내가 누구랑 자는 걸 봤다고? 루머를 퍼뜨린 대가는 당연히 치러야겠지? 김은지랑 가격 협상 다시 해봐.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밑지는 장사 같거든.” 여직원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김소연의 의미심장한 말은 단번에 기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 어느 카페의 한적한 룸 안. 정서우는 김소연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임신했다고?” 정서우의 표정에는 놀람보다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열흘 전에 용성에 있었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내가 그 개자식을 죽여버릴 거야.” 누굴 탓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오랫동안 허정우를 믿은 김소연의 잘못이다. 김소연은 주먹을 불끈 쥐고 사건의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정서우는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임신한 것도 모자라서 그 남자랑 결혼했다고?” “계약 결혼이야. 강제로 데려가는 바람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 정서우는 걱정되는 듯 재빨리 물었다.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나쁜 놈은 아니겠지?” 김소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아직 얼굴을 본 적이 없어. 심지어 이름도 몰라.” “뭐라고?” 정서우는 말을 더듬었다. “도대체 누구지? 완전히 베일에 싸였네.” 김소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서우야, 너 IT 전공이잖아. 나 좀 도와줘.” 정서우는 눈빛만 봐도 김소연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노트북을 꺼내 사이트로 들어갔고 아니나 다를까 메인 홈이 전부 장례식장의 기사로 도배되었다. 사람들은 김소연이 살아있다며 저마다 의견이 분분했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이때 김소연이 사진 두 장을 꺼냈다. “이 미친것들이 혼인신고 하러 갔어?” 모자를 꾹 눌러쓰고 있었지만 정서우는 단번에 김은지를 알아봤다. 김소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사진 두 장을 여러 언론사에 돌렸고 불과 5분 만에 여론이 들끓었다. [김소연 약혼자랑 김은지 아니야? 두 사람이 왜 구청 앞에 있는 거지? 심지어 오늘 아침이잖아.] [김소연이 장례식장에서 폭로했잖아. 허정우랑 김은지가 붙어먹어서 임신까지 했다고. 납치범을 매수해서 김소연을 죽이려 고했대.] [그 말이 사실이라면 모든 게 맞아떨어져. 김소연한테는 회사도 있고 재산도 있잖아. 설마 김씨 가문에서는 돈 때문에 친딸을 죽이려고 한 거야?] 김소연과 정서우가 흥미진진하게 사이트를 보고 있던 그때 각종 언론사의 인기 검색어가 뒤바뀌었다. 마침 김소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본 그녀는 비웃는듯한 표정을 지고선 무덤덤하게 전화를 받았다. “아빠? 무슨 일이에요?” 김기태는 애써 분노를 삼키고 있었다. “정우랑 은지 사진이 인터넷에 떠도는데 합성이니까 믿지 마. 너 지금 어디니? 얼른 집으로 와야지. 아빠는 네가 또 다치지는 않을까 너무 걱정돼. 아줌마가 맛있는 음식 준비했으니까 빨리 집으로 와.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요?” 사진을 퍼뜨린 당사자인 김소연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금방 갈게요.” “그래. 아빠는 집에서 기다리마.” 김기태는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를 들은 정서우는 곧바로 반대했다. “미쳤어? 그걸 왜 동의해? 이 타이밍에 너한테 연락이 온 걸 보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어.” 김소연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속는척하는 거지. 당분간은 예전처럼 지낼 거야. 우리 엄마의 죽음이 그 인간들이랑 연관되어 있거든. 게다가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인 걸 보면 외할아버지가 나한테 남긴 게 재산 말고도 뭔가 더 있는 것 같아.” “조심해.” “아직도 내가 열흘 전의 순진무구한 김소연으로 보여?” 김소연의 눈빛은 싸늘했고 그동안의 감정과 고생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 확고했다. 정서우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김소연이 그저 안쓰러웠다. “침술 도구 갖고 있지?” 정서우는 곧바로 가방에서 침술 도구를 꺼내 건네줬다. 김소연은 침을 놓을 줄 알았기에 정서우는 위가 아플 때마다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곤했다. “저녁에 연락할게.” 김소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 김씨 가문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김소연은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훑어봤다. 이때 노수영이 부랴부랴 달려와 다정하게 그녀를 안아줬다. “소연아,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들어가서 아빠랑 얘기하자. 회사는 여전히 네 거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는 너만 살아있으면 돼. 일단 여기에 잠깐 앉아 있어. 아줌마가 몸에 좋은 보양식 끓여줄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능글맞게 연기하는 노수영을 보니 자신이 눈치채지 못한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소연은 소파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소파를 등지고 누워있는 누군가가 보였는데 김은지였다. “왜 이래요?” 김소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러자 노수영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임신해서 몸이 무거운 데다가 네 죽음이 충격이었는지 쓰러졌어. 걱정하지 마,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소연아, 과일 좀 깎아서 먹어.” 김소연이 답하기도 전에 노수영은 과일칼을 그녀의 손에 쥐여줬다. 김소연은 과일칼에 자신의 열 손가락이 지문이 전부 찍힌 걸 보고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곧바로 고개를 돌려 의식 잃고 쓰러진 김은지를 바라봤다. “국이 아주 잘됐네. 소연아, 뜨거울 때 쭉 마셔.” 노수영은 상냥하게 곰탕 한 그릇을 건넸다. 김소연이 말없이 순순히 국을 마시자 노수영의 눈빛에는 사악함이 번뜩였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김소연은 어지러움을 호소했고 미간을 찌푸린 채 머리를 짚으며 물었다. “아줌마, 아빠는요? 아빠를 좀 만나고 싶은데...” “위층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어. 얼른 올라가 봐.” 노수영은 웃으며 답했다. 김소연은 난간을 짚으며 간신히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서재에는 김기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예전부터 그녀에게 흑심을 품었던 남자 주주 두 명이 있었다. “왔어요?” “당신들이 왜 아빠 서재에 있죠?” “여기서 소연 씨를 기다렸죠.” 김소연이 당황하며 뒤로 물러서자 노수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쾅 닫았다. “오지 마요.” 곧이어 방안에서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래층에서 모든 걸 듣고 있던 노수영은 김은지와 함께 깔깔거리며 웃었다. “살아 돌아오면 똑똑해지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멍청하네. 너랑 정우 사진을 퍼뜨렸으면 우리도 똑같이 돌려줘야지. 사생활이 더럽다는 증거를 내밀면 언론은 순식간에 가라앉을 거야. 내가 저 인간들한테 약물까지 챙겨줬어. 제정신이 아닐 때 넌 피를 묻히고 옆에 누워있기만 하면 돼.” 김은지는 완전히 뒤바뀔 여론은 기대하며 웃음을 금치 못했다. “살아있으면 뭐 해요. 어차피 곧 감옥에 들어갈 텐데.” 모녀의 얼굴에는 야비한 웃음이 떠올랐고 그들은 문 앞에서 귀를 기울였다. “왜 아무 소리도 안 나지?” 노수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동영상찍는 중인가?” 불안함이 밀려왔지만 성인 남성 둘이 연약한 여자 한 명을 제압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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