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결혼식 전날, 그녀는 이복 동생과 함께 납치되었다. 하지만 약혼자는 여동생만 구했는데...
납치범은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고 ‘찌익’하는 소리와 함께 사정없이 그녀의 옷을 찢었다.
김소연은 믿기 힘든 현실에 바보처럼 멍청하게 기다리기만 했다.
“잠시만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허정우가 돈을 챙겨서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납치범은 대뜸 웃음을 터뜨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은지야, 네 언니는 정말 멍청하네.”
김소연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곧이어 귓가에 김은지의 비아냥거림이 들려왔다.
“형부가 했던 말을 아직도 믿고 있는 거야? 사실대로 얘기해줄게. 나 형부의 아이를 임신했어.”
김소연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언제부터 날 속인 거야?”
“형부가 사랑하는 사람은 늘 나였어. 언니를 이용해서 회사를 얻은 것뿐이야. 이제 진정한 대표가 됐으니까 필요 없는 거지. 왜 납치됐는지 대충 짐작 가지?”
김소연은 손발을 벌벌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짓말하지 마. 허정우한테 직접 얘기하라고 해.”
“지금 나랑 같이 누워있는데? 임신했는데도 어찌나 성욕이 강한지 귀찮아 죽겠어.”
곧바로 남자의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연아, 넌 이제 이용 가치가 없어. 그만하자.”
김소연은 머릿속에 하얘졌다.
8년의 사랑은 회사를 독식하기 위한 남자의 이익 앞에서는 결국 속임수와 기만에 불과했다.
김소연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형부는 언니 시체라도 남기고 싶다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더 더러워졌어.”
“듣고 있지? 눈앞에 있는 여자는 원하는 대로 맘껏 가지고 놀다가 버려.”
“김은지, 내가 그동안 친동생처럼 아껴줬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엄마 아빠가 가만둘 것 같아?”
“설마 엄마 아빠가 언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김은지는 비꼬듯이 말했다.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던 김소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납치범에 의해 깊은 산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겁에 질려 온몸을 벌벌 떨고 있는 김소연과 달리 납치범들의 얼굴에는 사악한 웃음만이 가득했다.
허정우와 김은지의 계획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납치범들의 손에 놀아나는 상황은 더더욱 원치 않았다.
그녀는 산 아래 칠흑 같은 도로변에 주자 된 승용차 한 대를 보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문이 열려있었다.
차 뒷좌석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거대한 실루엣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뭔가를 억압하고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김소연은 필사적으로 납치범을 따돌리고 산 아래로 굴러내려가 차를 향해 달려가며 다급하게 애원했다.
“잠깐만 여기에 숨어있어도 될까요?”
“꺼져.”
어둠 속 차가운 눈동자는 반쯤 감겨있었고 남자는 거친 숨을 내쉬며 경고했다.
순식간에 납치범들은 코앞까지 쫓아왔다.
“누군가가 저를 쫓고 있습니다. 제발요. 이렇게 빌게요.”
김소연은 남자의 허벅지를 올라타 차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심하게 떨고 있어서 그런지 몸이 계속 남자의 바지에 닿았지만 김소연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둠 속 피에 굶주린 눈이 떠지고 남자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안 내려?”
“아직은 안 돼요.”
김소연은 운전해서 도망치려고 필사적으로 앞좌석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런데 이때 뜨거운 손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누가 보냈는지 모르겠는데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가는 건 안 되지.”
그 말을 끝으로 김소연은 남자의 손에 잡혔고 건장한 몸이 그녀를 덮쳤다.
김소연은 몸부림칠 틈도 없이 고통에 휩싸였다.
아무리 울며 밀어내려고 발버둥 쳐도 남자의 무시한 힘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점점... 밤은 깊어졌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김소연은 잠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남자는 아직 자고 있었고 날은 아직 밝지 않았다.
그녀는 옷을 챙겨 들고 황급히 차 밖으로 도망쳤다.
그날 밤, 김소연은 납치범에게서 벗어났지만 동시에 가장 소중한 순결을 잃게 되었다.
그녀는 차에 탄 남자를 돌아보기는커녕 한시도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아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
열흘 후.
죽어가던 김소연은 마침내 용성 김씨 가문에 돌아왔다.
도망칠 당시 그녀는 무일푼이었기에 지난 며칠 동안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고 목숨도 반밖에 남지 않은 듯 위태로웠다.
그러나 사라진지 열흘이나 되었지만 가족들이 그녀를 찾고 있다는 소식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순간 김은지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를 사랑하는 가족은 단 한 명도 없다는 말과 더불어 어려서부터 받은 불공평함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럼에도 차마 믿을 수 없었던 김소연은 반드시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김씨 가문의 뒷문. 싸늘하게 집안을 훑어보던 김소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때마침 거실에서 실랑이 소리가 들려왔다.
“시체도 못 찾았는데 어떻게 마음이 놓이겠니.”
계모 노수영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때 김은지가 사악한 심보를 드러냈다.
“아빠, 언니가 갑자기 찾아올까 봐 걱정되는 거면 영혼 결혼식이라도 하는 게 어때요? 돈도 벌고 영혼까지 묶어두면 완전히 일석이조잖아요.”
“그건 너무 잔인하잖니.”
이건 아버지 김기태의 차가운 목소리다.
김소연은 떨리는 몸을 감당하지 못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찬바람은 뼛속까지 스며들었고 도무지 믿기 힘든 현실에 허무함이 밀려왔다. 아버지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찾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고 계모와 김은지도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기는커녕 아주 잘살고 있었다.
그들은 영혼 결혼식을 내세우며 김소연의 영혼마저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했다.
“잔인하다뇨. 애초에 은지의 악운을 막아주려고 걔를 키웠잖아요.”
“게다가 우리가 그 애 엄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요. 당신도 비밀을 숨겨야죠. 안 그래요?”
“됐어, 그만해. 어차피 안 죽었으면 내 손으로 직접 죽일 거야.”
김기태의 목소리에는 아버지로서의 자애로움이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이 타이밍에 기사를 터뜨리는 게 좋겠어요. 은지랑 정우가 회사를 차지하게 됐으니 앞길을 잘 닦아줘야죠. 이제 소연이 외할아버지의 재산도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겠죠? 아참, 그리고 삼촌인가? 그 인간도 조만간 처리해야...”
악마가 득실거리는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지옥이 아닐까?
공포와 압도적인 분노는 그녀의 복부에 심한 통증을 일으켰다. 어머니의 죽음에 숨겨진 사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절대 이대로 죽을 수가 없었다.
김소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배를 움켜쥐고 뛰어나가 택시를 잡았다.
“병원으로 가주세요.”
[긴급 속보입니다. 김씨 가문의 큰 아가씨인 김소연 양이 그동안 불륜을 일삼았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결국 지난밤 깊은 산속에서 살해되었고 현재 유력한 용의자는 내연남으로 의심되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비참한 심정으로 시신을 찾고 있으며...]
택시의 라디오에서 뉴스가 들려왔다.
김소연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졌다. 가족들이 자신을 찾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이런 방식일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들은 그녀의 죽음에 온갖 오물을 쏟아부으며 명성을 더럽혔고 쓰레기만도 못한 허정우와 김은지가 당당하게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게 길을 터놓았다.
너무 원망스럽고 비참했다. 하지만 살고 싶었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이봐요, 아가씨?”
택시 기사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김소연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나, 어떻게 이렇게 심하게 다쳤지?”
김소연은 의사가 달려오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의 손등엔 바늘이 꽂혀 있었고 의사는 검진표를 손에 든 채 의아해하며 물었다.
“임신 호르몬 수치가 너무 높게 나왔습니다. 다친 것뿐만 아니라 임신해서 높게 나온 걸 수도 있어요.”
김소연은 한순간 벼락을 맞은 듯 얼어붙었다.
“네? 뭐라고요?”
“2주밖에 안 됐네요? 남자 친구분은 안 오셨나요?”
김소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순간 머릿속에 열흘 전의 그 밤이 떠올랐다.
운이 어찌나 없는지 바로 임신이 되었다.
의사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선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아이를 지우고 싶으신가요? 그럼 바로 수술 예약해 드릴게요.”
“그 아이는 절대 건드리면 안 됩니다.”
이때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이 응급실에 들이닥쳤다.
선두에 선 남자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곧바로 의사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 후 고개를 돌려 김소연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소연 씨? 임신 맞으시죠? 저희와 함께 가시죠.”
김소연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시죠?”
“아이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