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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그녀는 곧장 큰 망신을 당했다. 문 앞에서 이제 막 떠날 채비를 하던 화가가 돌연 표정이 굳어버렸으니까. 그는 고개를 홱 돌리고 이지아를 쳐다보더니 온몸을 벌벌 떨며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 이 학생 말이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아주 정확해요!” 화가는 희열에 찬 표정으로 되돌아와 작품 앞에 서더니 입술을 계속 파르르 떨었다. “이 그림은 모조품이에요. 모조품이라고요.” “거장 한서원 님 말고는 이 세상에서 누가 이렇게 웅장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겠어요?” “유감스럽게도 한서원 님이 재작년에 은퇴하시며 오직 세 작품만 남기셨죠. 그것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그런 작품들 말이에요. 그나저나... 지아 학생은 어떻게 한서원 거장을 알게 됐나요?” 그 물음에 이유영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주먹을 꽉 쥔 나머지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지경이었다. 오연주도 못 믿겠다는 눈빛으로 이지아를 쳐다봤다. 이지아는 싸늘한 시선으로 화가를 힐긋 쳐다보다가 돌아서서 문을 닫고 나가며 한마디 내던졌다. “내가 바로 한서원이거든요.” 그녀가... 한서원이라니. 이 말을 들은 오연주 일행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터졌다. “미쳐도 제대로 미쳤네. 전시회 나가겠다고 미리 공부라도 해둔 줄 알았더니 이거 완전 망상증 아니야?” “너 따위가 국제 유명 화가라고?” “유영의 반만 돼봐 봐. 그딴 도둑질이나 하지 말란 말이야. 그것만으로도 여한이 없겠어! 창피한 줄도 모르는 년, 쯧쯧.” 그랬다. 이전의 이지아는 확실히 이유영의 절반도 못 따라갈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지아는 더는 지난날의 이지아가 아니다. 훌륭해지려고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 ... 서재를 나선 이지아는 방으로 돌아가 컴퓨터를 열었다. 현재 급선무는 바로 체내의 독소를 강제로 빼내고 실력을 회복한 다음 하루빨리 진주 한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타닥타닥. 그녀는 피둥피둥 살찐 손으로 키보드에 코드를 두드렸다. 나름대로 깔끔하고 노련한 솜씨였다. 모니터에 블랙 스크린과 링크가 끊임없이 번쩍거렸다. 띠... [은행 시스템에 침입하고 있습니다.] [비밀번호를 입... 비밀번호가 해독 중입니다. 코드를 입력하십시오.] [띠... 비밀번호가 해독되었습니다. 카드 소유자의 실명을 입력하십시오.] [한...] 드디어 해독에 성공했다. 이지아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담담한 표정으로 모니터에 뜬 이체 금액을 보더니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미안하게 됐어, 유성 오빠.” 그녀는 은행 돈을 훔칠 리가 없다. 한편 그녀 명의 하의 계좌는 전부 한수연에 의해 비밀번호가 바뀌었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친오빠의 돈을 훔쳐야만 하는 한유리였다. 그 시각 진주 빌딩 안. 네 명의 20대 소년이 럭셔리한 소파에 앉아있었고 그 가운데 통유리창 가까이에 앉은 소년은 흰색 셔츠에 단추를 두 개 풀어서 탄탄한 가슴 근육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마디가 선명한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만지며 입꼬리를 씩 올리고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내뱉는 말투도 뼛속까지 오싹하게 할 지경이었다. “유준 형 말이 맞았어.” “이번에 수연이가 유리 대신 나서지 않았다면 아마 비행기 추락 사고 사망자가 유리였을 거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늘부로 우리 네 명 모두 유리 옆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자. 누가 감히 우리 유리 털끝 하나 건드리면 그 자식 집안 전체를 무너뜨릴 거야.” 사고 당시 폭파지점으로 뛰쳐 간 네 사람은 바로 한유리의 시신을 찾았다. 국과수의 거듭된 검증 결과 사망자는 한유리가 아닌 한씨 가문의 양딸 한수연이었다. “유성의 말이 맞아.” 등을 벽에 기대고 다리를 꼬고 앉은 정장 차림의 소년이 천천히 머리를 들고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운이 좋았다고 쳐. 다음엔 또 무슨 일이 일어날 건지 누가 장담해?” “세계 각국에서 유리의 죽음을 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나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오늘 집에 돌아온 유리가 전보다 좀 달라진 것 같아...” 전보다 달라졌다는 그 한마디에 머리를 숙이고 깊은 사색과 미안함에 잠겼던 소년들이 돌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들 검은색 정장 차림에 차갑고 엄숙한 표정을 지은 그 소년을 나란히 쳐다봤다. “큰형, 실은 나도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하지만 말투며 행동이며 외모와 분위기까지 분명 우리 유리인데. 심지어 실력도 그렇고 전에 발생한 세세한 사항까지 전부 맞아떨어졌어. 형 설마 이번 폭파 사고로 크게 충격받은 거 아니야?” “아니...” 검은색 정장 소년은 실눈을 뜨고 종잡을 수 없는 짙은 눈빛을 번쩍였다. “느낌이란 게 있어.” “유리만 보면 필사적으로 지켜주고 싶은 그런 느낌.” “기세라고 할까?” “유리 눈빛 하나에 모두를 굴복시키고 무릎 꿇게 하는 그런 기세...” 비록 그녀도 한유리와 똑같은 목소리, 생활습관, 외모, 실력, 심지어 기억까지 지니고 있지만 느낌이 와닿지 않았다. 왠지 꼭 전과 달라진 그런 기분이었다... 순간 방 안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이때 갑자기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셔츠 소년의 휴대폰 메시지 음이 울렸다. 소년은 무심코 고개를 숙이더니 말이 안 되는 메시지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헐!” “뭐야 이거!” 그가 비명을 지르자 나머지 세 명도 의아한 눈길로 바라봤다. 소년은 메시지 내용을 몇 번이고 확인해 보더니 충격에 휩싸인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내 국제 은행 계좌에서 1분 전에 2억 원이 빠져나갔어.” “뭐 고작 2억 원으로 호들갑이야... 잠깐! 뭐라고? 네 은행 계좌에서 2억 원이 빠져나가?” “유준아, 네가 그런 거야?” “그럴 리가. 난 손만 대면 최소 2천억이지.” “그럼 대체 누군데...” 누구일까? 과연 누가 한씨 가문 넷째 도련님의 은행 카드에서 2억 원이나 빼낸 걸까?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쓰는 은행 카드는 세계 1위 해커들이 직접 설계한 도난방지 시스템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넷째 한유성의 돈을 도둑맞다니?! “이 세상에서 우리 그룹 산하의 은행 도난방지 시스템을 뚫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야! 오직 한 명뿐이지. 그 사람은 바로...” “한유리!” “유리라고!!” “오직 유리만 이런 실력을 갖췄어.” 네 사람은 고개를 번쩍 들고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다들 눈 밑에 음침한 기운이 감돌았다. 넷째 한유성이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서 사이트와 IP 주소를 추적했는데 충격적인 내용을 알아냈다. 그의 돈을 훔친 사람은 진주가 아닌 강현시에 있었던 것이다. “진주가 아니야? 그러니까 이 돈을 훔친 사람이 유리가 아니란 뜻이네?” 늘 과묵하고 차분하던 맏이가 지금 이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한유리가 훔친 게 아니라면 대체 누구일까? 게다가 고작 2억 원을... 상대의 의도가 대체 뭘까?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눈앞의 세 사람을 보더니 압도적인 포스로 분부를 내렸다. “유성아.” “강현으로 가서 시스템을 뚫은 자가 누군지 반드시 알아내.”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적이든 내 편이든, 상대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반드시 도발해온 이 인간을 찾아내야 한다. 넷째 한유성이 강현으로 출발한 동시. 이제 막 돈을 구한 이지아는 이씨 저택을 나서서 강현시에서 제일 큰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적잖은 사람들이 그녀의 외모를 삿대질해댔고 심지어 누군가는 그녀가 한때 절도 사건으로 소년원에 갇힌 불량소녀란 걸 알아보기까지 했다. “스읍...” “못생겼어. 역겨워 정말.” “깜짝이야. 사람 잡겠네.” 병원의 간호사마저 짜증 섞인 얼굴로 이지아를 멀리했다. 충분히 상처를 받을 만한 말인데도 이지아는 듣는 척도 않으며 다 만든 해독제를 들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바로 이때... “선생님! 의사 선생님! 얼른 여기 와보세요, 사람 살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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