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이서야, 너 서림이네로 이사했니? 서림이 때문에 놀라 도망친 건 아닐까 하고 전화해 봤어.”
전수미는 농담하며 말했다.
“어머니, 약속했던 건 절대로 후회 안 해요. 걱정마세요. 지금 바로 가서 정리할게요.”
신이서는 전수미가 자신과 송서림의 결혼을 아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생명의 은인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송서림의 생각이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럼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서림이한테 말해.”
전수미는 드디어 미소를 지었다.
“네.”
통화를 마친 신이서는 음식을 사 먹겠다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져 곧바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아직 날이 밝은 틈을 타 서둘러 이사를 해야 했다.
집에 도착한 그녀는 곧바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생활용품을 제외하고는 고작 출근용 옷과 편하게 입을 홈웨어가 전부였다.
크고 작은 상자 두 개로 전부 모은 뒤 그녀는 자신의 집을 쳐다봤다.
벽에는 몇 년 전에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 아버지의 품에 안겨 중간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더는 그날로 돌아갈 수 없었다.
테이블로 다가간 그녀는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매만졌다.
“아버지, 걱정마세요. 제가 꼭 엄마를 구해내고 저희 가정도 잘 지킬게요.”
“참, 아버지. 저 결혼했어요. 고운성이 아니니까 앞으로 그 자식은 더 챙겨주지 마세요. 그럴 가치 없는 사람이에요.”
“제 남편은… 괜찮은 외모의 프로그래머예요. 대머리는 아니니까 걱정마세요. 좋은 사람이에요.”
말을 마치자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신이서는 화면을 흘깃 봤다. 낯선 번호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전화를 받았지만 맞은 편에서 들려온 건 고운성의 질책 섞인 목소리였다.
“신이서, 감히 날 차단해? 뭐 도둑이 제 발 저린 모양이지?”
말을 마친 신이서는 곧바로 눈을 흘겼다. 대체 누구보고 도둑이라는 건지.
“고운성, 난 어제 할 말 다 했어. 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신이서, 결국에는 그 2천만 원 때문에 그러는 거지?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우리 집에 자식이라곤 나밖에 없는 데다 다 나만 믿고 있는데, 내가 돈을 다 너한테 주고 나면 우리 부모님은 어떡해?”
고운성이 해명했다.
“그러니까 더는 필요 없다고. 끊을게, 더 이상 연락하지 마.”
“이서야, 그때 그 모임은 다 오해야. 그때 홧김에 한 말이었어. 나 너 아직 좋아해, 알잖아?”
고운성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신이서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짜증이나 그냥 쫓아내 버리고만 싶었다.
“고운성, 난 모르겠어. 아니면 차 명의 나한테 넘겨줘, 그럼 믿어줄게.”
“신이서!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넌 내가 너 아니면 안 되는 줄 알아? 딱 기다려!”
고운성은 진짜로 무언가를 희생해야 할 때만 되면 마치 그의 역린이라도 건드린 듯 그는 펄쩍 뛰엇다.
예전에는 연애할 때 사소한 걸 따지지 말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따지지 않는 건 자신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등을 돌리자 송서림이 조금 열려 있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깜짝 놀라 말했다.
“어머니가 데리러 가라고 해서요.”
송서림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투로 말했다.
“잠깐만요. 가서 창문이랑 가스만 확인하고요.”
말을 마친 신이서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말이 확인이었지 사실은 진정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남에게 자신의 우스운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방 안, 송서림은 차가운 눈으로 방을 훑어봤다.
인테리어가 구식이긴 해도 방은 학원가에 있었고 비록 작기는 했지만 가격은 꽤 괜찮았다.
이런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이서는 만족을 모르고 머리에는 온통 돈만 가득했다.
신이서가 전 남자 친구에게 차를 달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여자가 이렇게 욕심이 많다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돈을 달라더니 차까지 요구하다니.
정말이지 어떻게 자신의 어머니 앞에서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감탄이 나올 따름이었다.
그때 주방에서 나온 신이서는 자신의 캐리어 두 개를 잡아끌었다.
“됐어요, 가죠.”
“그래.”
송서림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러다 힘겹게 캐리어를 끄는 것을 보고는 결국 건네받았다.
비록 그녀가 싫긴 하지만 남자로서 일부러 여자를 난감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이서는 캐리어를 가져간 그를 보자 감격하며 말했다.
“고마워요.”
송서림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신이서는 송서림의 차가운 얼굴을 보자 괜히 무안을 사고 싶지는 않아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내리는 기분에 하루 종일 먹은 것도 별로 없던 터라 몸이 조금 안 좋아졌지만 그래도 억지로 송서림의 차 옆까지 걸어갔다.
송서림이 캐리어를 옮겨 주려 하는 것을 본 그녀는 곧바로 다가갔다.
“제가 할게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어지러움에 그대로 기절했고 그녀의 몸은 뜨거운 품에 풀썩 쓰러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신이서는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환한 불빛에 한참 동안 두 눈을 뜨지 못했다.
겨우 적응하고는 두 눈을 비비며 주변을 돌아보니 병원인 듯했다.
“깼어?”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던 송서림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저 어떻게 된 거예요?”
신이서가 물었다.
“저혈당이래.”
송서림은 휴대폰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신이서는 무의식적으로 흘깃 쳐다봤다. 화면 속에는 그녀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데이터들이었다. 송서림은 정말로 바쁜 것 같아 보였다.
근데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지?
원래는 송서림에게 물이라도 한잔 따라달라고 할 생각이었던 그녀는 그 생각을 접은 채 스스로 일어나 물을 따랐다.
하지만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는 않은 듯 사지가 나른해 겨우 일어났던 몸이 그대로 침대로 쓰러졌다. 다행히 송서림이 재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
송서림의 몸에서 나는 담배 냄새가 코끝에 닿자 그녀는 얼른 몸을 피했다.
그런 신이서에 송서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뭐 바이러스라도 되는 건가?
“뭐 줘.”
그는 냉담하게 말했다.
“물이요.”
신이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목소리도 조금 풀어졌다.
그 목소리에 송서림은 순간 흠칫했다. 누군가가 귓불을 깨물기라도 한 듯 간지러워졌다.
신이서는 평소 목소리도 달콤한데 아프니까 마치 한 입 베어 문 체리마냥 달디 달았다.
송서림은 휴대폰을 침대에 놓은 뒤 정수기 쪽으로 가 물을 한 잔 따랐다.
컵을 받아 든 신이서는 시선을 내리깐 채 물을 마셨고 길고 짙은 긴 속눈썹이 긴 음영을 만들어 내 하얗게 질린 안색을 좀 더 가련하게 만들어 주었다.
물을 마신 신이서가 막 숨을 내쉬려는데 배가 눈치 없이 꼬르륵거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신이서는 고개를 숙인 채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왜 송서림의 앞에만 서면 이런 난감한 일이 벌어지는 걸까?
평소엔 동료들 사이에서 엘리트 소리를 듣는데 말이다.
“잠깐만 기다려.”
송서림은 간단하게 한마디 한 뒤 등을 돌려 밖으로 나섰다.
“….”
뭘 기다리라는 거지?
신이서는 아직도 반병 넘게 남은 링거를 보며 하는 수 없이 다시 침대에 기댔다.
옆에 있던 초등학생이 링거를 맞으며 숙제를 하다 별안간 고개를 들어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누나, 엄마가 그러는데 누나 남자 친구 잘생겼대요.”
신이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요즘 초등학생은 다 이렇게 직설적인가?
초등학생 옆에 있던 여자는 곧바로 아이의 입을 막은 뒤 신이서를 향해 민망한 듯 웃었다.
“죄송해요. 애가 아직 철이 없어서, 마음에 두지 마세요.”
“괜찮아요.”
신이서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부러워요. 남자 친구가 옆에서 지키고 있으면서 회사 전화 몇 개나 거절하더라고요. 귀찮아하지도 않고 의사한테 찾아가서 상황도 물어보고요. 저렇게 잘생기고 다정한 남자 정말 흔치 않아요. 저랑은 완전 다르네요. 애를 낳고 난 뒤엔 남편은 죽기라도 한 건지 낮에는 출근하고 밤에는 애도 봐야 하고 애가 아프면 밤새야 하는 것도 저고….”
여자의 말은 점점길어졌지만 신이서는 앞부분 내용만 듣고는 한참을 넋을 놓았다.
저거… 송서림을 말하는 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