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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온서빈 씨, 온라인 면접에 합격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계약서는 메일로 보내드렸고 보름 안에 런던으로 오셔야 하는데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전화기 반대편에서 바다 건너 멀리 있는 남자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자 온서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번에 동의했다. “문제없습니다. 제시간에 갈게요.” 전화가 끊어질 때쯤 문이 열리고 심유정이 들어와 온서빈을 보자마자 살가운 얼굴로 종이봉투를 건넸다. “어제 로펌에 일이 생겨서 같이 새해를 맞이하지 못했네. 화 풀어.” 진심을 담은 그녀의 말에 온서빈이 별다른 질문도 없이 봉투를 건네받아 들여다보니 종이봉투 안에는 나무 팔찌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얼마나 성의가 없으면 팔찌에 아무런 포장도 하지 않았을까. 무척 비싼 거다. 하지만 이 팔찌가 비싼 게 아니라 세트로 들어있는 다른 염주 팔찌가 비싼 거고 이 나무 팔찌는 그저 증정품에 불과했다. 나무 팔찌가 있다는 건 심유정이 염주 팔찌를 샀다는 말인데 증정품을 그에게 준 거다. 어제 송성진이 보내준 사진 속 눈길을 사로잡는 질감과 크기의 팔찌를 보지 못했다면 온서빈은 5년을 사귄 여자 친구가 진품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남자 친구에겐 증정품을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거다. 로펌에 일이 있다는 핑계로 그와 함께 새해를 맞이하지 못한 대신 송성진의 곁은 지킨 것처럼. 하지만 그는 굳이 심유정의 속내를 들추지 않고 고맙다는 말을 전한 뒤 선물을 받았다. 온서빈이 선물을 받은 뒤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본 심유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막았다. “내 건 어딨어?” 갑작스러운 제지에 온서빈은 의아한 눈빛으로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심유정을 바라보았다. “네 거라니?” “잊었어? 네가 해마다 서로를 위하는 선물을 주고받자며?” 심유정의 표정이 굳어졌다. 본인은 약속을 지켰는데 정작 그가 잊어버렸을 줄이야. 이 말을 듣자마자 온서빈은 그제야 알아차린 듯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래 만난 사이에 부부나 다름없는데 이젠 그런 것까지 일일이 챙길 필요 없잖아.” 심유정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문득 그 말이 왠지 익숙하게 들렸다. 순간 작년 설날에 온서빈이 정성껏 선물을 준비했는데 그 약속을 기억하지 못한 자신은 그가 선물을 들고 찾아왔을 때 빈손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실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왜 약속을 잊어버렸냐고 물었고 그때 그녀는 어떻게 대답했던가. “오래 만난 사이에 부부나 다름없는데 이젠 그런 것까지 일일이 챙길 필요 없잖아.”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이 그대로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심유정은 그 말을 들었을 때야 온서빈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순간 할 말이 없었던 그녀는 어색하게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딱히 언급할 거리가 없자 결국엔 자신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나 배고파.” 그녀의 시선이 온서빈의 뒷모습에 고정된 와중에 그가 무심한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 “그게 다야?” 심유정은 그의 반응이 이렇게 무덤덤할 줄은 몰랐고 심지어 관심 없어 보이는 태도에 깜짝 놀란 표정이었지만 남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아니면? 밥 먹게 돈이라도 달라고?”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말하다가 점점 사그라드는 그녀의 목소리에 온서빈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당연히 그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심유정은 편식이 심했고 변호사가 워낙 바쁜 직업이다 보니 규칙적인 식사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녀의 배고프다는 말 한마디면 새벽 세 시라도 온서빈은 일어나서 밥을 차려주곤 했다. 그런데 이젠 그녀의 위가 아픈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돈 있으면 알아서 사 먹어. 난 조금 있다가 모임 있어서 나가봐야 해.” 그렇게 말하며 곧장 돌아서서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두 발짝도 떼기 전에 심유정이 손을 잡아당겼고 고개를 돌린 온서빈은 다시 한번 그녀의 어두운 표정을 마주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딜 가? 가서 뭐 하는데?” 온서빈은 그녀가 갑자기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힘을 줘도 손목을 잡은 그녀의 손을 떨쳐버리지 못했고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더 힘을 주자 손목에 통증을 느끼며 이마를 찌푸린 채 차가운 숨을 헉 들이켰다. “놔, 그냥 평범한 모임이야.” 여전히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자 심유정은 다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랬다. 온서빈은 한 번도 다른 일 때문에 그녀를 뒷전에 둔 적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심유정의 배고프다는 말 한마디에 곧장 주방으로 달려가 요리했지 언제 나갈 생각이나 했겠나. 하지만 이젠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차피 이미 그녀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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