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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육서진이라는 이름을 다시 듣는 순간 신지수는 마음속으로 증오가 걷잡을 수 없이 차올랐다. 전생에 그녀를 직접 감옥에 처넣으며 보여줬던 단호함과 냉정함이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또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자신을 도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신지수는 그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이내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마침 지시받고 뒤쫓아온 기사가 차를 대기시킨 덕분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올라탔다. “출발해요.” “네.” 운전기사 김병식이 서서히 액셀을 밟았다. 한편, 육서진의 차가 신씨 별장 입구에 도착했고 두 차량이 엇갈리는 순간 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무심한 얼굴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곧이어 눈이 부신 이른 아침 햇살 속에서 찰나의 아찔함을 끝으로 그림자에 가려진 섬세하고 완벽한 옆모습을 어렴풋이 보았다. 어딘가 차갑고 무심하며 도도한 이목구비가 빠르게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차에서 내린 육서진이 뒤를 돌아보았고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뒤에서 신윤아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진 오빠!” 그리고 몸을 돌리는 순간 다정한 모습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이 더욱 멋져 보였다. 이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은 애정이 넘쳤다. 신윤아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에 육서진이 도로 끝을 바라보며 물었다. “방금 지나간 사람이 아버님, 어머님이 찾으셨다는 친딸이야?” 신윤아는 흠칫 놀라더니 즉시 경계했다.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외모만 보면 신지수가 예쁜 편에 속하는 건 사실이다. 단지 서 있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신윤아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오빠도 봤어요? 그래서 무슨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이 들 게 뭐 있나?” 육서진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너스레를 떨었다. “단지 금지옥엽이 따로 없던 네가 찬밥 신세로 전락할까 봐 걱정될 뿐이지. 그때 가서 울며불며 난리 치면 또 내가 달래줘야 하잖아.” “아니거든요!” 신윤아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속으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억지로 빼앗고 싶어도 불가능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 ... 고급 승용차가 신씨 별장을 떠난 후 김병식은 백미러를 통해 신지수를 바라보며 공손하게 물었다. “목적지는 어디신가요?” “안심 한의원으로 가주세요.” 이는 강성시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한의원으로서 국보급 대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치료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김병식이 무의식적으로 한 마디 뱉었다. “어디 불편한 데 있으세요?” “아니요.” 신지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알바하러 가요.” 아르바이트라니? 김병식은 깜짝 놀라면서 한 편으로 그녀를 동정하기도 했다. 비록 재벌가 딸은 맞지만 여느 부잣집 자제와 다르지 않은가? 일단 신씨 가문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고, 더욱이 그동안 힘든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니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이내 그녀를 위하는 마음으로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오셨으니 직장은 그만둬도 되지 않을까요? 더는 힘들게 일하지 마세요.” 신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누군가 공짜로 주는 건 언제든지 다시 빼앗길 수 있어요. 오로지 본인의 손에 꽉 잡아야만 마음이 놓이는 법이죠.” 신씨 가문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버려질 때 가차 없이 내침을 당한 건 매한가지였다. 단지 스스로 익힌 지식과 능력, 의술만이 그녀가 발붙일 수 있는 근본이다. 김병식이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도로에 문제가 생긴 듯 차들이 꽉 막혀 있었다. 앞에서 아주 심각한 교통사고가 난 듯 누군가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잠깐 다녀올게요.” 신지수는 차에서 내려 꽉 막힌 도로 위를 지나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했다. 가벼운 접촉 사고라서 그다지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 한 사고 차량에 탑승한 할아버지가 충돌하는 와중에 급성병이 발병하는 바람에 숨이 가쁜 듯 시뻘게진 얼굴로 바닥에 누워 거칠게 호흡하고 있었다. 신지수는 전생의 장면이 이렇게 빨리 재현될 줄은 몰랐다. 왜냐하면 눈앞의 노인은 다름 아닌 육서진의 할아버지, 즉 현재 육씨 가문을 이끄는 장본인 육상철이다. 전생에 그녀는 육상철을 구한 덕분에 어르신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또한 신씨 가문과 육씨 가문이 혼담이 오갈 때 일부러 육서진과 결혼을 강요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향한 육서진의 원망은 극에 달했고, 그는 이 모든 게 꿍꿍이를 꾸며 설계한 작전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 분명 연회가 끝난 다음에 일어났던 일인데... 게다가 중독된 육상철을 구해줬지, 교통사고는 아니었다. 설마 전생 보다 앞당겨졌단 말인가? 마치 운명의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그녀가 아무리 되돌리려 해도 이미 정해진 숙명은 바꿀 수 없다고 알려주는 듯싶었다. 신지수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순간, 검은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정체된 다른 차선에 멈춰 섰다. “도련님, 도로가 완전히 막혔네요.” 운전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뒷좌석에서 쉬고 있던 남자가 서서히 눈을 떴다. 풍성한 속눈썹 때문에 눈두덩이에 그림자가 희미하게 생겼고, 날카로우면서 또렷한 이목구비는 표정 변화가 없없는지라압박감이 저절로 느껴졌다. 이도하는 알겠다고 짧게 대답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운전기사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같은 차에 탄 육이준이 손에 든 금장 초대장을 살랑살랑 흔들며 농담을 건넸다. “형, 이제 초대장 있으니까 정정당당하게 신씨 별장에 출입해도 되겠네?” 이도하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내 육이준의 손에서 홱 낚아채더니 내용 따위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한 여자의 이름에 시선이 사로잡혔다. 신지수. 보아하니 신씨 가문의 진짜 딸 이름인 듯싶었다. 이를 본 육이준이 겁도 없이 계속 깐족거렸다. “내 생각에 눈이 정말 예쁜 것 같아요. 이 정도면 외모도 나쁘지 않은 편이고, 특히 얼굴이 상당히 매력적이네요.” 이도하는 초대장을 옆으로 치우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준아, 저거 네 할아버지 차 아니야?” “네?!” 육이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즉시 고개를 기웃거렸고, 그제야 사고 현장에서 할아버지 차를 발견했다. 남의 가십거리에 정신이 팔려 정작 제 집안일은 뒷전일 뻔했다니! 육이준이 차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가는 찰나 이도하가 그를 덥석 붙잡았다. “형, 이거 놔요! 급한 불부터 끄고 올게요. 할아버지 구하러 가야 한단 말이에요.” 육이준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도하가 턱짓으로 현장을 가리켰다. 교통사고로 인산인해가 된 도로를 뚫고 누군가 뒤에서 유유히 걸어 나왔는데, 다름 아닌 방금까지 그가 예쁘다고 노래 부르던 신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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