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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악!” 신윤아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노수정의 뒤로 숨었다. 질겁하는 딸의 모습을 마냥 지켜볼 리 없는 노수정이 즉시 가정부와 별장 경호원에게 제지시켰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자 신정호는 대뜸 주먹다짐부터 했고, 오미란은 막무가내로 윗옷을 걷어 올리더니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자, 어디 한 번 건드려 보던가? 성추행죄로 고소할 거야!” 망나니는 봤어도 이렇게 염치없는 사람은 처음이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경호원도 차마 경거망동하지 못했고, 이내 커다란 별장 안에 고래고래 외치는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만 울려 퍼져 귀에 거슬릴 지경이다. 아무리 교양 넘치는 노수정이라고 해도 금세 얼굴이 굳어지며 호통을 쳤다. “그만 해요! 대체 얼마 원하는지 그냥 얘기해요.” 드디어 목적을 달성하자 신정호는 싸움질을 멈추고, 오미란도 옷을 내렸다. 이때, 신정우가 한 걸음 나서서 말했다. “100억 주면 당장 떠날게요. 앞으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죠.” 100억이라니!? 신지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욕심이 과해도 너무 과한 게 아닌가? “꿈 깨!” 신강욱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물론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협박과 다름없는 상황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신정우가 잠자코 듣고 있다가 냉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뭐 있죠? 아빠, 엄마, 여동생 데리고 얼른 갑시다. 갑부라고 해도 남의 집 딸을 납치할 수는 없는 법이죠.” 부모가 자기 자식을 데려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신정호와 오미란이 즉시 다가가 신윤아의 팔을 옴짝달싹 못 하게 붙잡았다. 발만 동동 구르던 노수정이 무의식중으로 얌전히 앉아 있는 신지수를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양부모와 오랫동안 같이 살았을 텐데 더는 행패를 부리지 말라고 한마디쯤은 해 줄 수 있지 않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이어 신지수와 눈이 마주칠 줄은 몰랐다. 실망과 무관심, 그리고 상처받은 눈빛. 어쩌면 노수정 본인마저 신지수를 향한 원망이 정작 딸에게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신지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지만 속으로 씁쓸함이 물밀듯이 밀려와다. 신정호 일가족의 악랄함을 직접 목격한 순간에도 노수정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바로 신윤아가 안쓰러운 나머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대신 나서서 도와주지 않은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정작 본인들의 친딸이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손에서 무려 18년이나 고통받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동안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신정호와 오미란한테서 채찍질만 당했을 뿐이었다. 어렵게 상봉한 친모마저 모든 애정을 온통 다른 사람에게 쏟아부을 줄이야. 전생이든 현생이든 그녀에게 관심은 단지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니. 날카로운 시선에 뜨끔한 노수정은 후회가 밀려와 변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신정호와 오미란을 막아서는 신지수를 발견했다. 이내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손 놔요. 저랑 같이 돌아가요.” 오로지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인 신윤아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비록 친부모가 아니더라도 키워준 은혜가 있는데, 내가 나중에 효도할 사람은 우리 양부모이지, 당신들은 그냥 남남에 불과해요.” 다른 사람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노수정이 한껏 격앙된 모습으로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신지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윤아 말이 맞아요. 그래도 힘들게 날 키워줬는데 제가 같이 가야죠.” 무릇 인간이라면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노수정의 욕심은 끝이 없다. 18년 동안 키운 양딸도, 본인의 친딸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100억 줄 테니까 이 수표 가지고 당장 꺼져. 앞으로 우리 딸들은 당신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노수정이 펜을 들고 수표에 거침없이 써 내려가더니 휙 던져버리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알겠어?” “물론이죠!” 신정우는 수표를 들고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위에 적힌 숫자를 들여다보며 너무 흥분한 나머지 손까지 떨었다. 신윤아는 초조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노수정의 팔을 붙잡고 흔들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설득했다. “엄마, 그냥 언니를 보내면 안 돼요? 이왕 잘못된 김에 기존 생활을 유지하는 게 더 좋지 않아요?” 노수정은 황당무계한 말에 두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자 마음이 약해진 나머지 침착하게 타일렀다. “윤아야, 어떻게 그런 말 할 수 있어? 지수는 내 딸이야. 물론 너도 마찬가지이고. 이는 영원히 변치 않아.” “알겠어요. 엄마. 제가 말실수했어요.” 신윤아는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 냈고, 여느 때처럼 조신한 모습으로 순순히 인정했다. 노수정은 신윤아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곧장 싸늘한 얼굴로 신정우 일가족을 향해 말했다. “당장 꺼지지 못해요?” 돈을 손에 넣은 세 식구는 흡족한 표정으로 별장을 나섰고 그제야 소란도 잠잠해졌다. 신지수도 떠나려고 했지만 노수정이 그녀를 덥석 붙잡았다. “지수야, 엄마가 별다른 뜻은 없었어. 제발 화내지 마, 응?” 노수정은 억울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설마 엄마를 버릴 거야...?” 누구든지 이 말을 들으면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하물며 사랑이 고픈 아이라면 더더욱. 전생에 신정우는 그녀의 팔을 부러뜨렸고, 이런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 자신뿐이었다. 하지만 신경은 한 번 다치면 회복이 불가능했고, 의사가 자기 병은 못 고치듯 본인에게 침을 놓을 방법이 없으므로 손을 잃은 불구자가 되었다. 당시 노수정이 얼마나 가슴 아파했는지 모른다. 또한 신정우라는 인간 말종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고, 언젠간 감옥에 처넣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하지만 신윤아를 데려가려는 망나니를 마주치는 순간 신정우의 죄를 묻는 대신 신윤아와 관계를 끊게 하려고 돈까지 쥐여주었다. 그때 신지수는 처음으로 버림을 받았다. 나중에 보상으로 친딸을 찾았다는 소식을 강성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연회를 개최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울며불며 애원하는 신윤아 때문에 남들이 그녀의 가짜 신분을 운운하며 조롱이라도 할까 봐 또다시 결정을 번복하여 자신을 양딸로 삼아 집에 남겨 두었다. 이는 신지수가 두 번째로 버림받은 순간이었다. 그러고 나서 세 번째, 네 번째... 이번 생에는 또 몇 번이나 버림당할 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노수정의 만류에 신지수는 굳이 연기하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지난 생을 떠올리는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저한테 가지 말라고는 하는데 이곳에 대체 무슨 신분으로 남아있어야 할까요?” “넌 내 딸이야. 무려 10개월 동안 뱃속에 품고 죽을힘을 다해 낳은 딸이라고.” 노수정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죄책감에 맹세했다. “엄마가 네 신분을 공개 선언할 테니 앞으로 넌 아까 그 사람들과 아무 상관 없는 사이야. 즉 내 친딸이자 신씨 가문의 자제라는 뜻이지.” 이 말을 듣고도 신지수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윤아가 펄쩍 뛰었다. “엄마, 만약 언니의 정체를 밝히면 저는 어떡해요? 친구는 물론 학교에 내가 신씨 가문의 딸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게 되는 순간 다들 비웃기 바쁠 텐데...” 물론 이 문제에 대해 노수정도 예상은 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뾰족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윤아가 훌쩍이며 아이디어를 냈다. “엄마, 아니면 언니가 좀 억울하긴 할 텐데 사람들에게 우리 집에서 입양한 아이라고 설명하는 건 어때요? 그럼 언니도 마음 편히 집에서 지낼 수 있고 저도 남들한테 손가락질당하는 일이 없을 거예요.” 누가 들어도 한 사람만 유리한 제안이지 않은가? 하지만 노수정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게 무슨...” 신지수는 더 들어줄 것도 없는지라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이때, 노수정이 황급히 그녀를 끌어당겼다. 이내 소매가 위로 올라가면서 팔이 훤히 드러났는데 채찍에 맞은 상처로 뒤덮여 있었고, 새로 생긴 흉터와 기존에 있는 흉터만 보더라도 결코 한 두 번 얻어맞은 게 아니었다. 노수정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누가 때렸어?” 신지수는 무덤덤하게 소매로 팔을 가린 뒤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일이라 익숙해지면 별거 아니에요.” 익숙해지면 별거 아니라니... 신지수의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가 노수정의 가슴에 거센 물결을 일으켰다. 남의 집 딸을 공주처럼 키워주며 모든 관심과 사랑을 쏟아부었지만, 정작 본인의 친딸은 짐승만도 못한 일가족의 손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추위에 떨고 매까지 얻어맞다니! 이를 떠올리자 노수정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손이 떨렸고, 심장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릴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비로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똑같이 어두운 안색으로 옆에 서 있는 신강욱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보, 준비 좀 부탁할게요. 초대장 뿌리고 날짜는 다음 주 일요일이 좋을 것 같네요. 드디어 내 딸을 찾았다고 온 세상에 알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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