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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해프닝이지만 신윤아의 고함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신지수는 갑자기 속이 울렁이는 기분이 들었다. 육서진이 있는 곳이라면 공기마저 탁하게 느껴졌다. 이내 뒤에서 지켜보는 시선을 무시한 채 별장 거실에서 빠져나와 정원에 바람을 쐬러 갔다.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오른 야경이 아름다운 밤, 선선한 저녁 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신지수의 초조함이 점점 사라져갈 때쯤 정원 근처에서 희미한 피비린내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혹시 다친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이내 냄새를 따라 한 발짝씩 천천히 다가갔다. 월계화가 만발한 꽃밭을 지나 모퉁이를 돌자, 자갈이 깔린 오솔길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시체가 보였다. 그리고 시체 앞에는 훤칠한 키에 탄탄한 몸매, 날렵하면서 늘씬한 모습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달빛 아래에서 고개를 숙인 채 피로 얼룩진 가늘고 긴 손가락을 느긋하게 손수건으로 닦았는데, 섬세하고 꼼꼼한 동작은 마치 심각한 결벽증 환자 같기도 했다. 신지수는 자기 집에서 살인 현장을 목격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너무 놀라서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옆의 가로등이 갑자기 깜빡이는 바람에 손을 닦고 있던 키 큰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준수한 외모는 신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고, 마치 조물주가 정성스럽게 조각한 듯싶었다. 이목구비는 물론 턱선, 피부, 얼굴형까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지라 그녀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일수록 더 위험한 법이다.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카리스마는 결코 무시할 수 없고, 그윽하고 날카로운 눈빛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신지수는 아까만 해도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눈앞의 남자를 알아보는 순간 흠칫 놀랐다. 그는 다름 아닌 신명시 이씨 가문을 이끄는 이도하였다. 전생에 이도하의 이름을 전해 들은 적이 결코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소문에 의하면 워낙 잔인하고 매정하여 피도 눈물도 없으며 변덕이 유난히 심하다고 했다. 하지만 신명시의 거물이 왜 코딱지만 한 강성시에 나타난 거지? 심지어 살인자로서 신씨 별장 정원에 모습을 보이다니? 연회 초청자 명단에 이도하가 있을 리 없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강성시 전체가 발칵 뒤집혔을 것이며 그녀가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다시 말해서 행적을 숨기고 몰래 잠입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실물을 목격한 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가능성이 매우 컸다. 신지수는 본인의 싸움 실력으로 일반인은 상대해도 이도하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결국 눈이 먼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곧이어 옆에 있는 꽃을 더듬거리며 실명한 사람처럼 뒤로 조금씩 물러나 도망갈 준비를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이도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신지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탈출에 속도를 가하려는 순간 가로등이 깜빡거렸고, 이도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에 나타나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덥석 붙잡았다. “윽!” 비록 무의식중에 발버둥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뼈마디가 선명한 커다란 손은 마치 쇠집게처럼 옴짝달싹 안 했다. 숨이 점점 막혔고, 얼굴이 벌게지면서 이마에 실핏줄이 불끈 튀어나왔다. 순간, 그녀는 전생의 죽기 직전으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질식감을 동반한 목숨을 잃어가는 고비에 처한 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신지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이더니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남자의 하체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무모한 시도에 불과했다. 다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 이도하에게 의도를 간파당한 나머지 목을 조이는 힘만 더 세지게 했다. 이도하는 실소를 터뜨렸다. 눈앞의 계집애가 자신을 불구로 만들려고 온 힘을 다해 걷어찰 줄이야. 물론 제 주제도 모르고 덤볐을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신지수는 마지막 살아남을 기회마저 잃었고 이대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곧이어 목구멍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저도 모르게 흘러냈다. 밤하늘 아래 붉어진 눈시울과 구슬 같은 눈물, 그리고 애원하는 눈빛과 발악하는 소녀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약해졌다. 이도하는 신지수의 눈물을 살포시 닦아주었다. 손가락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왠지 모르게 서늘하면서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예쁜 눈동자에서 눈물을 흘리다니, 꽤 불쌍해 보이는군.” 다정한 손짓, 나지막한 감미로운 목소리는 마치 연인 사이의 속삭임 같았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 때문에 등골이 오싹했다. 이때, 꽃밭 반대편에서 그녀를 부르는 노수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딸이 보이지 않아 사방을 찾으러 다니는 듯싶었다. 이곳이 곧 자신의 무덤이 되는 건가 싶었는데, 이도하가 목을 놓아주더니 입을 열었다. “할 말과 못 할 말 정도는 구분할 수 있지?” 신지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아요. 전... 아무것도 못 봤어요.” 꽃밭 너머로 노수정이 다가오기 직전 그녀는 얼른 정원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때, 등 뒤의 가로등이 다시 깜빡이더니 전구가 갑자기 폭발했다. 그리고 뒤돌아보자 바닥에는 산산조각이 난 파편을 제외하고 이도하는 물론 땅 위에 시체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반면, 공기 중에 떠도는 희미한 피비린내만이 방금 일어난 일이 사실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지수야, 어디 갔어? 엄마가 한참 찾았잖아.” 노수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둘러 뛰어왔다. “죄송해요.” 신지수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목이 졸려 죽을 뻔했을 때 이도하한테서 나는 피비린내가 분명했다. 이는 누군가에게 기습당해 다쳤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생사를 알 수 없던 시신이 아마도 몰래 습격한 범인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왜 신씨 일가에 나타났냐는 점이었다. 비록 의혹이 끊이지 않았지만 우선 마음을 추스르고 화장을 고친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보며 이도하에게 목이 졸려 생긴 손자국을 파운데이션으로 가린 다음 노수정과 함께 별장 거실로 돌아왔다. 신윤아와 육서진은 오해를 푼 듯 거실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동시에 연주하는 찰떡호흡을 선보였다. 두 남녀는 한눈에 봐도 제법 잘 어울렸다. 노수정은 신지수를 바라보았다. 아까 정원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몇 번이나 다시 삼키며 결국 참다못해 은근히 기대하는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지수야, 아직 날 한 번도 엄마라고 부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머니란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 신지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내 대답하려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엄마! 얼른 오세요.” 바로 금방 연주를 마친 신윤아였다. 굳이 그녀가 아니더라도 대신 불러주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신지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연회는 절반을 지나 거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다. 이때, 육상철이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를 본 사람들이 우뚝 멈춰서더니 하나같이 물었다. “어르신,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육상철이 웃음을 터뜨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오늘 친히 방문한 목적도 여러분 앞에서 공식 선언할 일이 있기 때문이죠.” ‘드디어 양가의 혼사를 발표하려는 순간이 다가온 건가?’ 신윤아는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육씨 가문과 신씨 가문의 혼사는 강성시에서 이미 소문이 자자했기에 딱히 놀라울 일도 아니라서 농담을 건네는 손님도 있었다. “어르신, 만약 양가의 혼사를 발표하는 거라면 다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죠. 차라리 어떤 아가씨가 더 마음에 들었는지 알려주시겠어요?” “맞아요. 현재 신씨 가문에는 두 명의 따님이 있잖아요.” 너스레를 떠는 사람들을 보자 신윤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다들 눈이 멀었나? 정녕 자신과 육서진이야말로 천생연분이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설령 육상철이 콕 집어 얘기하지 않더라도 육씨 가문의 예비 며느리는 오로지 그녀밖에 없다는 건 모두가 알아줬으면 했다. 육상철도 뜸을 들이는 대신 신강욱, 노수정 부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혼사 좀 얘기해볼까? 우리 집 막내 손자 육서진과 당신네 딸 신지수를 결혼시키는 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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