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링거 4개를 맞고 나서야 임하나는 열이 내렸다. 하지만 의사는 그녀의 체내에 아직 염증이 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열이 내렸지만 이틀 더 입원하여 링거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저녁이 되자, 임하은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나야. 괜찮아?”
임하나는 언니를 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 괜찮아.”
“갑자기 왜 열이 나고 그래?”
임하은은 걱정스러운 듯이 동생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임하나보다 7살이 많은 임하은은 때로는 언니로서 때로는 엄마로서 동생을 보호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사이가 아주 끈끈했다.
임하나는 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어젯밤에 찬바람 맞았나 봐. 이제 괜찮아.”
임하은은 임하나가 정신이 맑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시름을 놓고 곁에 있던 이지영을 보았다.
“이분은?”
“안녕하세요. 전 이지영이라고 해요. 하나 씨 동료에요.”
이지영이 예를 갖춰 손을 내밀며 임하은과 악수를 했다.
“안녕하세요. 지영 씨가 우리 하나를 데리고 병원까지 와준 건가요?”
“아뇨.”
이지영이 고개를 저었다.
“하나 씨를 데리고 병원으로 온 사람은 저희 대표님이에요. 저는 그냥 곁에 있어줬을 뿐이에요.”
“너무 고마워요. 우리 하나 성격이 너무 소심해서 걱정이었는데. 지영 씨 같은 동료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네요.”
“별말씀을요.”
이지영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육현우가 다시 돌아올 일은 없겠다고 생각하고는 소파에 있던 가방을 들며 말했다.
“언니분께서 오셨으니 전 이만 갈게요.”
임하은은 이지영을 배웅하고 돌아와서 임하나를 향해 말했다.
“사람 괜찮아 보이네. 새로 사귄 친구야?”
임하나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우리 회사에서 얘기도 안 해.”
이지영은 평소에 아주 열정적이었지만 회사에서는 안은실과 가장 친했다. 임하나는 소심한 성격으로 회사에서는 그저 일만 할 뿐 사교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사실 임하나는 오늘 특별히 자신에게 열정적인 이지영이 의아하던 참이었다.
“그래도 참 좋은 사람이네. 하루 종일 네 곁에 있어줬으니까 말이야.”
“응.”
신세를 지기 싫어하는 임하나는 오늘 일을 반드시 이지영에게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임하은은 병원이 너무 시끄러우니 집에 가서 쉬는 게 좋겠다고 했다. 임하나는 딱히 시끄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언니가 곁에 없으니 공허한 마음에 임하은의 결정을 따랐다.
두 사람이 병원을 나설 때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순간 임하나는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임하은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 임하나의 몸에 걸쳐준 것이다. 본인 역시 얇게 입었지만 임하나의 걱정만 하는 언니의 모습에 임하나는 입술을 깨물며 더욱 빨리 걸어 택시를 잡았다.
택시에 오를 때 형부인 진우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에 회식이 있어 늦게 들어가니 자신을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임하은은 잔소리를 몇 마디 했고 상대는 성가시다는 듯 대충 대꾸하더니 통화는 끝났다.
임하나가 임하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언니. 나 언니가 끓여준 국수 먹고 싶어.”
임하은이 웃으며 답했다.
“그래. 집에 가면 해줄게.”
“응.”
집에 도착한 임하은이 임하나를 부축하여 방으로 들어갔다. 베개를 임하나의 등에 받쳐주고 따뜻한 물을 떠주고는 걱정이 된다는 듯 임하나의 이마를 짚어보며 말했다.
“여기서 쉬고 있어. 가서 국수 끓여줄게. 금방이면 돼. 무슨 일 있으면 날 불러.”
임하나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임하은은 앞치마를 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임하나는 이불을 걷어 침대에서 내렸다. 그녀는 살금살금 언니의 방으로 들어가 서랍을 열어 손쉽게 피임약을 찾아냈다. 얼른 설명서를 훑어본 임하나는 알약 두 알을 삼켰다.
저녁을 먹고 임하나는 샤워를 했다. 옷을 벗고 거울 앞에 마주하여 몸에 난 흔적들을 본 임하나의 머릿속에는 뜨거웠던 어젯밤으로 가득 찼다.
낮에 많이 잔 탓인지 아니면 몸이 아픈 탓인지 임하나는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몽롱한 상태의 그녀는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자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방문을 살짝 열었다.
거실의 조명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바닥에는 남자의 넥타이와 양말이 어질러져 있었다. 진우석은 술 냄새를 풍기며 소파에 널브러졌다.
그러자 임하은이 바닥을 치우며 말했다.
“내가 술 적당히 마시라고 얘기했잖아. 네 꼴을 좀 봐. 내일 또 머리 아프다고...”
“재잘재잘 말이 많아. 내가 마시고 싶어서 마신 줄 알아? 너 때문이잖아. 이 집구석과 너의 그 쓸모없는 동생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잖아.”
임하은이 버럭 화를 냈다.
“우리 하나는 건들지 마.”
“왜?”
진우석이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 집에서 내가 주는 음식 먹으면서 사는데 내가 말도 못 해? 걔가 뭔데 내가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하나 일자리 찾았어. 그리고 하나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생활비 주고 있잖아. 뭘 네가 주는 걸 먹었다고 그래?”
임하은이 동생의 편을 들었다.
그러자 진우석이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좋아! 그렇게 대단하면 내일 당장 이사 가라고 해. 꼴도 보기 싫으니까!”
“하나는 내 동생이고 내 유일한 가족이야. 아직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일자리도 금방 찾은 시점에 내쫓는 건 무슨 경우야?”
진우석이 바닥을 가리키며 건방진 표정으로 말했다.
“여긴 내 집이야. 내 돈으로 산 집이라고. 매달 대출 갚는 사람도 나야. 내가 꺼지라고 하면 꺼져야지!”
“너...”
임하은은 화가 난 나머지 눈물이 터졌다.
그러나진우석은 취해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한참 지나 임하은이 눈물을 닦고 진우석을 부르며 말했다.
“됐어. 씻고 방에 가서 자.”
임하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그날 밤 임하나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일찍 임하나는 아침을 준비하고 언니에게 봉투와 쪽지를 남기고 캐리어를 끌고 언니의 집을 떠났다.
임하은이 진우석과 결혼한 데에는 임하나의 원인도 있었다. 임하은은 줄곧 여자 둘이 힘들게 살았으니 집에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지는 않을 거라고 했었다. 임하은은 학력이 낮았기 때문에 평소에는 길거리에서 작게 노점을 했는데 수입이 많지 않았고 집을 마련하는 것은 아주 먼 꿈에 불과했다.
진우석은 평범한 대학교를 졸업하여 상장 회사에서 근무했다. 처음에는 살가웠던 그가 요즘은 스트레스가 심했던 탓인지 성질이 점점 사나워졌다. 게다가 자주 술에 취해서 집에 돌아왔고 집에 돌아오면 임하은과 싸웠다.
임하나가 있었기 때문에 임하은은 줄곧 싸울 때마다 진우석에게 머리를 숙였다.
임하나는 임하은이 진우석을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언니와 형부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집을 나왔다. 임하나는 진심으로 그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는 8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며 임하나와 밖에 있던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순간 엘리베이터 손잡이를 잡고 있던 임하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