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임하나는 자리에 앉아 스크린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사실 머릿속은 뒤죽박죽 복잡하기만 했다. 방금 그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언니를 제외하고는 누군가가 이렇게 자신을 지켜준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녀와 피부를 맞댔던 남자였다. 그 생각에 임하나의 마음은 따뜻해졌다.
옆에서 흐느끼는 안은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다른 동료들은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은실 씨, 울지 마요. 화장 지워지겠어요.”
“그래요, 은실 씨. 대표님이 뭐라고 하지도 않았잖아요. 우리 중에서 은실 씨가 가장 예쁘고 능력 있는데 대표님이 어떻게 은실 씨를 나무라겠어요?”
안은실은 고개를 들어 분노의 눈빛으로 임하나를 노려봤다.
“예쁘면 뭐 해요? 능력 있으면 뭐 해요? 결국엔 저런 간사한 년한테 당하는데.”
모든 사람은 약간의 호기심이 담긴 눈빛으로 임하나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녀와 육현우의 관계를 추측하고 있는 듯했다.
사무실 문이 열리자 육현우가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한승호가 그의 뒤를 따랐다.
육현우의 눈빛 한 방에 안은실을 둘러싸던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갔다.
안은실은 눈이 벌게진 채로 육현우를 바라봤다.
안은실은 예쁘장하게 생겼고 유복하게 자라 부서 사람들의 예쁨을 한 몸에 받았다.
눈물이 글썽이는 눈빛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게 했다. 그리고 안은실도 자신이 있었다. 만약 육현우가 자신을 한 번이라도 쳐다본다면 분명히 마음을 빼앗길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육현우는 그녀가 아닌 가장 외진 구석에 있는 임하나를 바라봤다.
“임하나 씨.” 육현우가 그녀를 부르자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의 귀가 모두 쫑긋 세워졌다.
임하나가 일어섰다. 소심한 그녀의 모습은 육현우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평소 회사 내부의 일에 신경 쓰지 않지만 저번 캠핑 이후로 이상하게도 임하나에게 이끌리기 시작했다.
“노트북 챙기고 나 따라와요.” 육현우는 말한 후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임하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고개를 숙인 채 그를 따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사무실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잠시 후, 누군가가 물었다.
“임하나라는 사람 말이에요, 도대체 정체가 뭐죠?”
펑!
안은실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로 세게 내던지더니 화장실로 달려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
고급 마이바흐 한 대가 아스팔트를 달리고 있었다. 임하나는 옆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더니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님,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죠?”
“성사시켜야 할 프로젝트가 있어요.”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는 육현우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임하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 저예요?”
육현우의 비서팀에는 수십 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가득했다. 반면, 임하나는 겨우 인턴일 뿐이었고 아침에 정직원 승낙을 받긴 했지만 아무 경험이 없는 사회초년생이었다. 이지영의 말대로 육현우가 비즈니스를 하러 나가는데 그녀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육현우는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고 대답했다. “한스 그룹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죠. 하지만 신인 개발에도 힘쓰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초보일 뿐이잖아요...” 임하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자신 없어요?” 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손등을 발견하자 육현우의 목소리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나 한스 그룹 대표예요. 그러니까 나만 믿으면 돼요.”
비즈니스 장소는 한 고급 찻집으로 정해졌다. 육현우와 임하나가 도착했을 때, 상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여 그들은 먼저 룸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마자 임하나는 한승호가 사라졌다는 걸 발견했다.
“여기 와봐요.” 육현우는 이미 소파에 앉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박스 하나를 열었다.
임하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서야 그것이 소형 의료 상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육현우가 미리 준비해 둔 것 같았다.
육현우는 그 안에서 소독약과 면봉을 꺼내더니 말했다. “손 이리 줘봐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임하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표님, 저...”
꿈틀거리는 그녀 때문에 답답했는지 육현우는 그녀를 바로 잡아당겼는데 실수로 그녀의 손등을 눌러버리고 말았다.
“쓰읍.” 임하나는 고통에 숨을 들이마시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육현우는 손을 놓고 대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손을 뒤집자 하얀 피부 위로 물집과 빨갛게 부은 살결이 눈에 들어왔다.
육현우가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그는 면봉에 소독약을 묻혀 임하나의 손등에 발랐다.
면봉이 살결에 닿을 때마다 임하나는 고통에 몸을 떨었다.
그때 그가 동작을 멈추고 말했다. “물집은 터뜨려야 하는데.”
물집을 터뜨린다는 말에 임하나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곧이어 육현우는 의료 상자에서 작은 바늘을 찾아내고는 말했다.
“조금 참아요. 아플 거니까.”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임하나의 마음을 녹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남자를 바라봤다.
육현우의 이목구비는 마치 신이 정성스럽게 조각한 작품처럼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웠다. 그는 지금 턱을 꽉 물고 그녀보다도 더 긴장한 듯 보였다. 이런 남자는 돈이 많지 않더라도 따르는 여자가 수두룩할 것이라고 임하나가 생각했다.
육현우는 그녀의 물집을 하나씩 터뜨렸다. 고개를 들어 그녀의 맑은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재밌어요?”
임하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물집이 다 터진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방금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느라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육현우는 그녀에게 약을 발라주고 또 붕대를 감아줬다.
“물에 닿지 않게 조심해요. 아니면 곪을 거니까.”
“감사합니다.” 임하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했다.
...
잠시 후, 한승호는 사업 파트너와 함께 들어왔다.
상대편 일행은 모두 남자들이었고 그래서인지 그들은 임하나를 보자마자 잠시 멈칫했다. 육현우와 악수를 하며 인사할 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육 대표님이 여비서를 데리고 나오는 건 처음인데요? 이걸 성의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그 말을 들은 임하나는 약간 놀랐다.
회의는 두 시간 넘게 지속되었다. 임하나는 육현우 뒤에서 두 시간 넘게 앉아 있으면서 노트북으로 그 내용을 빼곡히 메모했다.
“육 대표님과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상대가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악수를 청했다.
육현우도 예의를 갖춘 채로 대답했다. “저도 영광이죠. 여러분께 스위트룸을 준비해 두었으니 먼저 방으로 돌아가 쉬시다가 저녁에 함께 식사하시죠. 서 대표님께서 자리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육 대표님이 부르는데 당연히 가야죠.” 서 대표가 말하고는 또 임하나를 바라봤다. “하나 씨, 저녁에 봐요.”
임하나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한승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성사시켰네요.”
임하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성공한 건가요?”
옆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이 프로젝트의 투자금은 무려 몇천억에 달했다.
“네. 성사시킨 거예요.” 한승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하나 씨, 그거 알아요? 이 프로젝트 이미 1년을 질질 끌었어요. 대표님께서 오늘 직접 나서지 않으셨다면 이번에도 성사되지 않았을 거예요. 대표님 엄청 대단하시죠?”
육현우는 그를 무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부할 시간에 주방이나 한 번 더 살피는 게 어때? 성공할지 아닐지는 오늘 저녁 식사에 달려있으니까.”
한승호는 바로 웃음을 거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지금 바로 가보겠습니다.”
...
스위트룸으로 돌아온 후 육현우는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임하나는 별다른 일이 없는 것을 보고 방으로 돌아갔다. 막 누우려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떠오르는 이름을 보며 임하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