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환한 불빛이 송이준의 준수한 얼굴을 비추었고, 설령 고개를 숙이고 있을지언정 남자의 매서운 눈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애초부터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최성훈에게 시집가겠다고 고집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꼴은 면했을 텐데...
어차피 인연도 아닌 사람과 오로지 의지력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온 셈이었다.
소윤정은 송이준이 던진 질문에 충격을 받았고, 마음속 깊은 곳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건드려서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다.
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도무지 몰라서 결국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숙이고 묵묵부답했다.
이는 단지 질문이 아니라 고문에 가까웠다.
초반에는 진심으로 최성훈을 대하면 아무리 무뚝뚝한 남자라고 할지언정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되었다. 최성훈은 무뚝뚝한 게 아니라 감정이 없는 사람이고, 마음을 사로잡기는커녕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지금의 그녀는 이미 만신창이에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송이준은 가슴이 미어졌고, 여자의 가녀린 턱선을 내려다보며 최성훈을 향한 불만이 점점 더 커졌다.
“윤정아, 왜 너만 모르는 거니? 최성훈은 널 사랑하지 않아!”
비록 지난 5년 동안 해외에서 유학하며 소윤정과 연락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의 근황에 늘 관심을 가지고 항상 동창들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듣고는 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윤정아, 대체 무슨 이유로 최성훈과 결혼한 거야? 널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푸대접받아도 상관없어? 강수아를 좋아하는데도 용서할 수 있어?”
소윤정은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한 채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고, 얼굴은 핏기가 점점 사라졌다.
결국 당황한 나머지 연신 뒷걸음질 치며 그녀를 추궁하는 듯한 송이준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마치 잘못을 저지르다가 걸린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남,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선배랑 상관도 없고 관여할 자격도 없죠.”
갑자기 정곡을 찔리자 여태껏 억눌러왔던 묵은 감정이 봇물 터지듯 터졌다.
가슴속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었던 말 못할 상처가 썩어 문드러지고 딱지가 생겨 곪아 터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동안 외면했던 너덜너덜한 마음을 송이준이 난데없이 난도질하는 바람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꿋꿋이 버티고 서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묵묵히 참아내는 소윤정의 모습을 보자 송이준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가 한층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윤정아, 넌 절대로 참고 사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동안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이혼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거야? 최성훈이 너를 찬밥 신세로 대하고 소중히 여길 줄도 모른다고 해서 스스로 자포자기한다는 게 말이 돼?”
소윤정은 충격적인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눈물을 참으려고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눈시울이 금세 빨개지더니 속눈썹마저 촉촉하게 젖었다. 물기를 머금은 속눈썹은 군데군데 뭉쳐서 눈두덩이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는데, 연약하고 안쓰러운 모습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소윤정을 바라보는 송이준은 마치 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듯 괴로웠다.
이내 두 팔을 벌려 위로해주려고 품에 안으려고 했으나 그녀에게 거부당했다.
“선배, 괜찮으면 하준을 데리고 이만 가봐도 될까요?”
소윤정은 이처럼 비참하고 나약한 모습을 남한테 제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머릿속으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도망치는 것이었다.
마치 겁을 먹은 토끼처럼 입술마저 창백해진 그녀를 보자 송이준은 더는 몰아붙일 수가 없었다.
이내 한숨을 내쉬고 뒤로 물러서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윤정아, 내 말 잘 들어. 얼른 그 쓰레기 같은 남자와 헤어지고 이혼해. 이 세상에 좋은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굳이 최성훈 같은 몹쓸 놈한테 목을 매달 필요가 있어? 네가 훨씬 더 아까워.”
소윤정은 제 자리에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진 채 뜨악한 얼굴로 송이준을 바라보았고, 만신창이가 된 심장이 갑자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혼이라니? 정말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송이준의 말은 마치 벼락처럼 다가와 그녀의 나약해진 마음을 모질게 채찍질했다.
게다가 망망대해 속에 빛나는 등대마냥 시야를 넓혀주고 방향을 지시해줬다.
이때, 그녀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빛이 반짝거렸다.
그동안 항상 최선을 다한다면 아무리 무뚝뚝한 최성훈일지언정 언젠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마음이 떠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5년이라는 세월 동안 1,800일이 넘는 밤낮을 지새우며 그녀가 대체 어떻게 1분 1초를 버텼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밤이 깊어질수록 점점 식어가는 가슴은 오로지 본인밖에 느끼지 못했다.
드디어 열이 내린 하준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운동기구를 부축한 채 엄마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엄마, 나 졸려요.”
소윤정은 서둘러 아들을 품에 안고 이마를 만져보았다.
컨디션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볼에 뽀뽀했다.
“그래. 얼른 돌아가서 자자.”
휘청거리며 녀석을 안아 올리는 소윤정을 보자 송이준이 하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엄마는 힘드시니까 아저씨가 안아줄까?”
남자의 미소는 봄바람처럼 따스했다.
소윤정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하나도 안 힘들어요.”
하준은 송이준의 웃음에 홀라당 넘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윤정의 어깨에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송이준은 녀석을 꼭 끌어안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준이 착하네. 엄마 생각할 줄도 알고.”
아이는 갑작스러운 찬사에 부끄러운지 얼굴을 품에 파묻었다.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6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신입 간호사가 그들을 발견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아내 분과 아드님이세요? 정말 미인이시네요. 아드님도 너무 귀여우세요!”
소윤정이 해명하려고 입을 열려는 찰나 송이준이 먼저 대답했다.
“네, 예쁘죠? 귀엽죠? 간호사님도 두 눈 부릅뜨고 하루빨리 이상형을 찾으시길 바랄게요.”
간호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 참. 선생님, 방금 30호 병실 환자분이 해열 주사를 맞았는데 아직 결제를 안 했거든요? 수납 영수증 드릴 테니까 이따가 들르면서 가져다주시면 안 돼요? 보호자 분한테 얼른 처리해달라고 해주세요.”
30호 병실은 하준이 묵는 곳이기에 소윤정은 간호사 말을 듣고 한껏 예민해져서 즉시 수납 영수증을 챙겼다.
“네, 지금 계산할게요.”
그리고 허둥지둥 셀프 계산대로 뛰어가 카드를 꽂았지만 화면에 잔액 부족이라는 문구가 떴다.
소윤정은 수납 영수증을 들고 민망한 나머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결혼한 지 5년이 넘었지만 최성훈의 돈은 단 한 푼도 사용한 적이 없었기에 아들의 병원비조차 내기 힘든 지경까지 왔다.
그녀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찰나 송이준은 은행 카드를 꺼내 리더기에 꽂아 넣었다.
순간 두 사람의 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매우 가까웠고, 누가 봐도 젊은 부부 같았다.
이때, 괜스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느껴져 소윤정은 기분이 싸했다.
고개를 들자 멀지 않은 곳에 칼날처럼 서늘한 눈빛과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서 있는 최성훈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