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교통사고
순간 멈칫한 나는 입꼬리가 아프게 물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막 그를 있는 힘껏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남녀 간의 힘 차이는 명확했고 내 힘으로는 염지훈에겐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염지훈, 역겹게 굴지 마.”
나는 계속 발버둥을 쳤고 목소리는 이미 갈라져 있었다.
내 말이 귀에 들어가긴 한 건지 염지훈이 멈췄다. 얇은 입술은 매혹적으로 조금 부어 있었고 그는 그렇게 검은 눈동자로 뚫어지게 쳐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숨을 내쉬었다.
“송여월과 같이 있을 때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거야? 말로 안 되면 억지로?”
“역겨워?”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고 내 불편함은 무시한 채 옷자락을 들어 올리더니 커다란 손은 내 배를 누르고 거친 손가락은 내 배 위의 흉한 흉터를 매만졌다. 이내 조롱 섞인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냉소를 흘렸다.
“그래, 꽤 역겹긴 하네.”
나는 마치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대로 얼어붙었다. 순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와 숨이 다 가빠졌다. 어떤 사람들의 말은 딱 한 마디만으로도 사람을 넝마로 만들었다.
그는 내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단박에 명중할 수 있었다.
그래, 나도 한때는 내 배 위의 이 흉측한 흉터를 더없이 역겹워할 때가 있었다. 이 흉터는 20살의 내가 얼마나 멍청하고 무지했는지를 시시각각 알려주고 있었다.
“하….”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냉랭한 남자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더는 그를 쳐다볼 힘도, 그의 조롱을 더 듣고 있을 기력도 없어 나는 염지훈을 확하고 밀쳐냈다.
내가 가려는 것을 본 그는 다시 손을 뻗어 나를 잡으려고 했지만 나는 그 손을 빠르게 피했다. 내 착각인 건지, 어쩐지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난….”
뒤의 말을 나는 듣지 못했다. 이미 서재 밖으로 황급히 도망친 뒤였기 때문이었다.
안방 안.
침대에 누운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저 온몸의 기력이 다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변경에서 나는 어떻게 지냈었지? 살육, 더러움, 학대….
아니, 어떤 과거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살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욕실로 향했고 샤워기를 틀었다. 차가운 물로 굳어버린 몸을 씻어내리며 조금씩 이성과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날 밤, 악몽이 끊이지가 않았다.
이튿날, 나는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시끄러워 잠에서 깼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했던 탓에 두통이 심했던 나는 휘청이며 문을 열었고, 문밖에는 다급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진한일이 보였다.
초조해하는 그의 몸에는 군데군데 피도 묻어 있어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요?”
다급해서인지 진한일은 목소리마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대표님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지금 병원에서 응급 수술 중이에요. 사모님, 얼른 저와 함께 가주세요.”
말을 마친 그는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곧장 나를 끌고 마당을 나가 차에 태웠다.
다급하게 차에 시동을 거는 진한일을 본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가만히 있다가 웬 교통사고?
진한일은 운전을 하느라 길을 살피며 대답했다.
“아침에 대표님께서 송여월 씨와 함께 청아산의 사찰에 기도를 올리러 가셨는데,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사고를 당하셨어요. 대표님께서는 방금 전에 막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셨고요.”
청아산 사찰에 기도하러 갔다고? 고개를 숙인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겨우 아침 7시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청아산 사찰로 향하는 길은 편도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니 두 사람은 해도 뜨기 전에 나갔다는 건가?
하, 도대체 기도를 하러 간 건지 데이트를 하러 간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진한일은 아주 빠른 속도로 운전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병원에 도착했다.
그를 따라 응급실 문 앞으로 가자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송여월이 보였다. 몸에는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내가 막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염씨 가문 쪽에서도 사람이 도착했다. 바로 염씨 가문의 노집사 주영백이었다.
송여월이 숨을 헐떡이며 우는 것을 본 그는 잠시 멈칫하다 나를 보며 물었다.
“사모님, 어떻게 된 겁니까? 가만히 있다가 왜 갑자기 교통사고가 난 거예요?”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송여월을 쳐다본 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저씨, 질문 상대가 잘못됐어요.”
주영백은 잠시 멈칫하다 송여월을 쳐다봤다.
송여월은 꽤나 적극적이었다. 주영백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송여월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지훈이를 해쳤어요. 저를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면 지훈이도 다치지 않았을 텐데, 다 저 때문이에요.”
저 가련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이 다 아파왔다.
말끝마다 염지훈이 다 자기를 위해 그런 것이라고 하는 송여월에 주영백은 난감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다행히 응급실의 문이 열리며 안에서 흰 가운 차림의 의사가 나왔다. 그에 송여월은 얼른 달려 나가 의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 깨어났어요?”
그 의사는 그녀를 흘깃 보더니 위로했다.
“환자분께서는 깨어나셨습니다. 다만 오른쪽 다리의 신경이 다쳐서 당장 수술에 들어가야 하니 보호자 분은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해주셔야 해요.”
“할게요, 할게요!”
의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여월은 황급히 펜을 받아 사인을 했다.
그 의사는 무심하게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환자분과는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