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하선아에게 자신이 키운 농작물을 사달라고 얘기했다.
그녀의 집뿐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파는 것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으로 판매한다고 해도 택배 값이나 이런 것들이 끼게 되기에 어떻게 하든 적자밖에 나지 않았다.
그런데 하선아가 대뜸 사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좋은 판매처인가.
“알겠어요. 제가 필요하면 다시 연락 드릴게요. 다들 저한테 연락처 남겨주세요.”
하선아는 고구마를 사겠다는 말 한마디로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열정적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 탓에 정작 신부인 안주희 쪽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선아는 어차피 들러리를 서지 않아도 되는 거면 굳이 결혼식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미리 안주희에게 축의금을 전해주었다. 어차피 할 것도 많았으니 말이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10만 원 정도는 크게 따지지 않고 줄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은 크지 않은 마을이기에 보통은 축의금으로 2, 3만 원 정도만 주었고 가끔은 만원 정도밖에 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안주희는 자신보다 더 예뻐진 하선아 때문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가 축의금으로 10만 원을 받게 되자 기분이 풀린 듯 활짝 웃으며 그녀와 얘기를 나눴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건 결국에는 돈이었다.
오후.
집에는 하정욱과 양윤경, 그리고 이현숙이 하선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하선아가 들어오자 양윤경은 그녀가 신발을 벗기도 전에 헐레벌떡 다가가 물었다.
“선아야, 너 채란 씨네 고구마를 전부 다 사들인다고 했다던데 그거 진짜야? 게다가 손이나 언니네 감자까지 사들인다고 했다며?”
이 마을은 늘 이렇게 비밀이 없었다.
“네, 맞아요. 채소랑 과일을 대량으로 요구하는 고객이 있거든요. 그래서 집에서 심은 수박이랑 토마토도 제가 다 사들이겠다고 한 거고요. 물론 배추도요. 앞으로 정기적으로 공급해줘야 해요.”
서준수가 있는 곳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기에 채소와 과일은 이쪽에서 보내줄 수밖에 없다.
“잘됐네. 아주 잘 됐어. 선아 네가 아주 복덩이야! 요즘 안 그래도 채소를 파는 게 어려워서 너희 아빠랑 골머리를 앓고 있었거든.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겠다.”
만약 하선아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은 또다시 아침 일찍 읍내로 가서 채소를 팔아야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시간대에 따라 파는 값도 갈랐다. 아침에는 상대적으로 비싸게 팔 수 있지만 오후나 저녁에는 조금이라도 가격을 낮춰야 전부 다 팔 수 있었다.
요즘은 해가 다르게 풍년이지만 채솟값은 나날이 저렴해지고 있어 사람들의 주머니 사정은 점점 더 안 좋아져만 갔다.
젊은이들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향한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선아가 이렇게 전부 다 사들이면 그들에게는 아주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아빠, 앞으로는 수확하는 족족 읍내에 있는 창고에 넣어주시면 돼요. 주소는 제가 이따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그래 알았다. 우리 딸 덕에 아빠가 아주 큰 근심을 덜었어. 큰 도시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구나.”
하정욱은 기분이 좋은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 트랙터도 사드릴게요. 기계가 있으면 훨씬 더 편하게 일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하선아가 웃으며 말했다.
“트랙터 그게 얼마나 비싼데. 됐어. 이제까지 잘 해왔는데 뭐. 돈 아껴.”
하정욱은 기곗값이 얼마나 비싼지 알기에 한사코 거절했다.
“얘, 그런데 너는 왜 집안사람이 아닌 다른 집을 먼저 돕니? 네 큰아버지도 고구마 심잖아.”
이현숙이 달려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선아가 채란 씨랑 이미 계약했다고 하잖아요. 그렇다고 그걸 물러요?”
양윤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이미 선금까지 치렀는데 이제 와서 사지 않겠다고 하면 그림이 이상해지고 만약 큰아버지네 사정까지 고려해 그쪽 고구마도 사들이면 너무 많이 사들이는 것이 된다.
“당연히 물러야지! 계약이고 뭐고 네 큰아버지네 고구마를 사.”
이현숙은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는 얼굴로 당당하게 요구했다.
“무르는 건 안 되고 큰아버지네 고구마는 제가 며칠 뒤에 상황을 봐서 구매하는 거로 할게요.”
하선아도 서준수 쪽의 상황을 봐야 하기에 무턱대고 많은 양의 고구마를 주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현숙은 그녀의 말에 얼굴을 구기더니 목소리 톤을 높였다.
“며칠 뒤라니? 큰아버지네 고구마를 놔두고 이웃집부터 챙긴다는 게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니?”
“제가 딱 잘라 거절한 것도 아니고 며칠 뒤에 상황을 보겠다고 하잖아요.”
하선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오채란네처럼 선금으로 10만 원을 먼저 줘. 그래야 네 큰아버지도 안심할 테니까.”
10만 원이 큰돈은 아니었지만 하선아는 돈을 맡겨놓은 사람처럼 구는 이현숙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안 되겠네요. 제가 지금 돈이 없거든요. 저도 고구마를 다 팔아야 돈이 생기지 않겠어요? 그리고 할머니 말씀대로 큰아버지는 가족인데 가족끼리 꼭 이래야 해요?”
“오채란한테는 10만 원을 줬다며! 그런데 네 큰아버지한테는 안 주겠다고? 너 정말 우리 집 식구 맞아?!”
하정욱은 이현숙과 하선아 사이의 분위기가 팽팽해지자 얼른 중간에 끼어들어 중재했다.
“선아야, 너 오늘 피곤했겠다. 얼른 올라가서 쉬어.”
“네, 그럼 전 이만 올라가 볼게요.”
“가긴 어딜 가? 돈 주기 전까지는 어디도 못 가!”
이현숙은 돈을 꼭 받아낼 심산인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알겠어요. 제가 드릴게요. 그럼 됐죠?”
하정욱이 다급하게 말했다.
만약 이 일로 이현숙이 화를 못 이기고 기절하면 한 소리 듣게 되는 건 자신이었기에 얼른 돈을 줘 일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어차피 어제 하선아에게서 140만 원이나 받았기에 10만 원 정도는 줘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럼 지금 당장 줘!”
이현숙은 정말 지독하게 확실한 사람이었다.
“여보, 엄마한테 10만 원 줘.”
돈은 모두 양윤경이 관리하고 있었다.
“선아가 살지 안 살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이 무턱대고 돈부터 주라고? 그러다 우리 선아가 손해를 보게 되면?”
양윤경은 자기 딸 편이었다.
하정욱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지만 이현숙은 한번 물고 늘어지면 끝을 보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빨리 이 일을 여기서 끝내고 싶었다. 게다가 이 일로 이현숙이 다음 달에 형네 집이 아닌 이 집에 한 달 더 살겠다고 할까 봐 겁나기도 했고 말이다.
“빨리 가서 돈 가지고 와.”
양윤경은 하정욱의 체념한 눈빛에 인상을 잔뜩 구기며 돈을 가지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하정욱에게는 형이 두 명 있었고 누나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이 있었는데 늘 이렇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그들 집안이 손해를 봤다.
하지만 이현숙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2주나 더 이 집에 머무르며 그녀를 괴롭혔던 걸 생각하면 차라리 돈을 줘버리는 게 나았다.
이현숙은 10만 원을 손에 쥐고서야 활짝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양윤경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됐어. 다 늙은 노인네 이겨서 뭐해. 당신이 참아.”
하정욱은 양윤경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당신 어머니는 어쩜 저렇게 한결같아? 짜증 나 진짜!”
“솔직히 선아 생각하면 나도 괘씸해. 그런데 어쩌겠어. 그렇다고 엄마가 지난번처럼 우리 집에 2주나 더 머무르게 할 수는 없잖아.”
“그건 그래...”
두 사람은 이현숙의 말을 들어주지 않음으로 생기는 피해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한편 하선아는 위층으로 올라간 후 바로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좋아요와 코멘트가 계속해서 달리는 걸 보니 곧 베스트 셀러에 오를 것 같았다.
하선아는 공간 안에 있던 음식이 다 사라진 것을 보고는 서둘러 노트에 지난번에 줬던 소설의 3권과 서점에 있던 다른 책들도 달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