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주다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동자 속 어둑한 감정을 눌러 담으며 말했다.
“저는 지금 병원이 이번 처치 실수의 책임을 저한테 뒤집어씌우려고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든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요. 그런데 원장님이나 교수님이 저를 계속 막는 걸 보면, 혹시 진실을 밝히지 못하게 하려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변호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주다인 씨, 현실을 직시하세요. 당신 혼자 힘으로 운해 대학 병원을 상대하는 건 무리예요. 게다가 우리 쪽에서 이 사건을 맡게 되면 저희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데 알아보시죠...”
주다인은 물러서지 않고 반박했다.
“당신들은 변호사잖아요. 국민의 권리를 지켜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건 맞지만, 이런 사건을 맡는 건 우리한텐 앞길을 스스로 막는 짓이나 다름없어요. 우리도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그렇게 주다인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쫓겨났고 이후에도 운해시 곳곳의 로펌을 찾아다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사건을 맡겠다고 나서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핸드폰을 쥔 그녀의 손끝이 서서히 하얗게 굳어갔다.
이 모든 일이 누군가의 조작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정말 심진우 짓일까?’
‘내가 자기한테 빌게 만들려고 이렇게까지 수작을 부린 거야?’
하늘에선 가느다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그녀의 얼굴을 때리는 순간, 차가운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 택시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광경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출장길이던 강재혁은 원래 그곳을 지나칠 참이었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주다인의 모습을 본 순간 이상하게도 비서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하는 주다인의 모습에 강재혁은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네.’
하지만 상대는 심씨 가문의 도련님 심진우였다. 재력도 인맥도 모두 갖춘 그와 달리 주다인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런 그녀가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강재혁의 시선은 버스 정류장 아래로 숨어든 주다인한테로 꽂혔는데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드러나는 그녀의 실루엣에 그의 숨이 살짝 거칠어졌다.
그 순간, 비서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대표님, 주다인 씨를 도와드릴까요?”
‘도와?’
강재혁은 냉정하게 웃음을 흘렸다.
‘내가 도와줘도 고마워하지 않을 거야.’
‘그럼 왜 도와줘?’
강재혁은 다시 차분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됐어. 가자.”
“네, 대표님.”
한편, 검사 센터 앞, 송청아는 또다시 출입을 막혔다.
더는 참지 못한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고 날카로운 기세로 외쳤다.
“지금 제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전 송씨 가문 딸이에요. 제가 엄마 대신 결과를 확인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죠?”
그러나 직원은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채 말했다.
“아가씨,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모님께서 이번만큼은 절대 누구도 출입시키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저희가 전문적인 절차에 따라 정확하게 처리하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송청아는 얼굴이 일그러져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친딸인데, 엄마가 제가 온 걸 모를 리가 없잖아요. 당신들이 철저하게 일하는 건 알아요. 이 정도면 들어갈 수 있죠?”
그녀는 슬쩍 다가가 가방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숫자만 봐도 거절할 이유가 없을 액수였다.
그 돈이면 충분히 편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직원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규정에 어긋나기에 저희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비도 오고 날도 어두우니 돌아가시죠.”
그 단호함에 송청아가 입술을 깨물고 온몸을 떨며 하이힐을 신은 채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나자 부하가 우산을 들고 얼른 쫓아갔다.
“아가씨, 비 맞으시면 사모님께서 마음 아파하십니다!”
차에 올라탄 송청아는 힘껏 문을 닫으며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로 검사 센터를 노려보았다.
‘좋아. 못 들어가게 막겠다는 거지? 그럼 다른 방법을 써야지.’
‘엄마가 그렇게까지 진실된 결과를 바란다면 절대 주다인을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면 돼.’
‘내 자리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어.’
송청아는 눈빛을 가라앉힌 채 물었다.
“병원 쪽은 어떻게 됐어?”
“원장님이랑 교수님은 이미 설득했습니다. 주다인 편은 안 들 거예요. 오늘도 주다인은 운해시 내 로펌을 다 돌았지만, 어디서도 사건을 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소식에 송청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오늘 하루 유일하게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주다인, 대체 뭐로 날 이기겠다는 거지?’
‘진짜 친딸이면 뭐? 난 끝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야.’
‘처음부터 틀린 거니까 끝까지 틀리게 둘 거야!’
그 시각, 주다인은 택시를 타고 겨우 집에 도착했다. 젖은 몸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심진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온몸이 차가워질 만큼 젖어버린 주다인은 그를 본 순간 얼굴이 차갑게 굳었고 눈엔 붉은 기운이 서렸다.
“심진우, 너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데?”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소파에 기대앉아 물에 젖은 그녀를 비웃었다.
“넌 아직도 네 주제를 몰라.”
‘날 떠나서 좋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주다인은 온몸이 싸늘해지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짜 심진우 짓이었어!’
그 순간, 뼛속까지 차가운 증오로 얼어붙은 주다인은 처음으로 감정을 참지 못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똑똑히 내뱉었다.
“심진우, 나 주다인이 어떻게 되든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 네가 재벌 집 도련님이면 뭐? 잊었어? 내가 너 찬 거야!”
그 한마디에 심진우의 얼굴이 확 바뀌었고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주다인! 내가 몇 번의 기회를 줬는데, 그걸 이렇게 짓밟아?”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다가와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었다.
“지금 넌 일자리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 그런 네가 병원을 상대로 뭘 할 수 있는데?”
그는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주다인의 턱을 쥐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난 아직 널 다 즐기지도 못했어. 네가 내 여자로 돌아온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게. 어때, 주다인? 이건 네가 손해 볼 것 하나도 없는 거래야.”
심진우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예전처럼 낮게 고개를 숙여 입 맞추려 했다.
하지만 입술이 가까워지기 전에 주다인은 그를 강하게 밀쳐냈다!
심진우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밀쳐지며 뒤로 비틀거렸다.
주다인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고 뛰쳐나가면서 손에 든 핸드폰으로 112를 눌렀다.
“심진우, 이곳은 내가 세 든 집이야. 네가 무단으로 들어온 거라 경찰을 부를 수 있어!”
심진우는 완전히 참을 수 없었다.
“주다인, 더는 안 참아!”
그가 그녀를 쫓아가자 주다인은 이웃집 문을 두드리며 급히 소리쳤다!
그 집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커플이 살고 있었다. 평소에도 문제가 생기면 주다인이 그들을 도와주곤 했기에 이번에 그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