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한기현은 자신이 최선의 제안을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한가을의 눈동자에선 그 어떤 감정의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됐어요.”
한때 이 집안 가족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요리를 배우고 마사지를 배우고 조각을 배우고 심지어 그들을 위한 부적까지 직접 썼었다.
그들의 환심을 사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았지만 단 티끌만큼의 진심도 얻지 못했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순간조차 그들이 그녀에게 보낸 건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이딴 가족 나도 이제 싫어.’
가차없는 거절에 한기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저 주제도 모르는 게. 우리 집안에서 나간 이상 네가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한편, 위로하는 척 다가간 한여름은 둘만 들을 수 있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한가을에게 속삭였다.
“아, 그리고 원우 오빠 나한테 고백했다? 좋은 날 잡아서 약혼식부터 올리려고. 언니가 원우 오빠 좋아했던 거 알아. 그래도 우리... 축복해 줄 거지?”
우쭐하는 한여름을 바라보던 한가을이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누가 그래? 내가 걔를 좋아한다고?”
“뭐?”
예상치 못한 반응에 오히려 한여름이 당황하고 말았다.
집에서 쫓겨나는 마당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고백했다는 사실을 알면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무릎을 꿇을 줄 알았는데 한가을은 같잖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 되겠어? 그래도 축복할게. 두 사람 절대 헤어지지 말고 백년해로 하길 바라. 괜히 헤어져서 멀쩡한 사람들한테 피해주지 말고.”
‘차라리 잘됐네.’
그녀의 말에 한여름의 얼굴이 표독스럽게 변했지만 한가을은 홱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절 키워주신 양육비는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당신들과 연락할 일 없을 거예요.”
한씨 가문이 그녀를 잡아두었던 연을 끊어냈으니 한여름은 한가을이 과거 막아주었던 액을 2배로 돌려받게 될 것이다.
게다가 양육비까지 전부 돌려주었으니 금전적인 인과도 끊어진 상태, 오늘 일에 대한 업이 한가을에게 쌓일 일도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찌를 바라보던 한가을이 말했다.
“어차피 그 팔찌 얼마 못 가지고 있을걸? 아마 곧 네 손으로 돌려주게 될 테니까.”
말을 마친 한가을은 미련없이 별장 대문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수영은 분노에 찬 얼굴로 바닥을 쾅 내리찼다.
“어머, 어머. 쟤 좀 봐봐. 저게 한때 가족이었던 사람들한테 할 소리니? 여름이만 아니었어도 진작 내쫓는 건데.”
이에 한여름은 백수영의 등을 쓸어주며 엄마를 달랬다.
“시골로 간다는데 그 속이 속이겠어요? 충격이 너무 커서 저러는 걸 테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주지 말아요.”
“넌 애가 너무 착한 게 탈이야.”
딸의 머리를 쓰다듬던 백수영은 한가을이 멀어지는 쪽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그 사고를 당했는데 살아? 귀신이라도 붙은 건가? 이렇게 내보내서 다행이지 그 귀신이 우리한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라.”
“됐어. 그만들 해.”
침묵하던 한성태가 깔끔하게 화제를 끝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한가을이 그들의 집을 벗어나는 순간, 저택 위를 비추던 태양이 먹구름에 가려진 것도 모자라 기운까지 한껏 음산해졌다.
게다가 구석에서는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갔다. 드디어 갔어.”
“이제 이 집은 우리 거야. 히히히.”
...
6월의 뜨거운 기온이었지만 길을 걷는 한가을은 더운 기색은 커녕 이마에 땀 한 방울조차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낸 한가을은 연락처에서 한성태가 줬었던 친부모의 연락처를 터치했다.
연락처를 받고 한 번도 연락해 본 적이 없는 터라 한가을은 그녀의 친부모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산골에 산다면 가난할 게 분명할 것이다.
‘상관없어. 어차피 대학교 등록금이며 학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백수영이 말했던 노총각과의 결혼 같은 건 걱정도 하지 않았다.
‘난 그렇게 팔리 듯 시집가지 않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낯선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려던 그때 저 멀리서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쪽 가로숫길에 검은색 마이바흐 10대 정도가 일렬로 맞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한씨 가문 저택이 있는 곳은 비록 최고의 부자 동네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 외제차를 몰 수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있었으므로 그저 이 근처에 사는 모 회장님의 차겠거니 싶어 조용히 옆으로 물러섰다.
그런데, 그녀가 옆으로 비켜선 순간, 차량들은 2열로 줄을 맞추더니 동시에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다음 순간 차 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 흰 장갑의 기사들이 우르르 내렸다. 딱 봐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것 같은 그들 중 한 명이 가장 중간에서 달리던 차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뭐야?’
한가을이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때, 고급스러운 회색 정장 원단으로 감싼 긴 다리가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훤칠한 키와 몸에 딱 맞게 제작된 정장이 그의 화려한 이목구비에 고급스러움과 우아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온 남자는 목소리마저 완벽했다.
“한가을?”
자신과 어딘가 닮은 듯한 남자를 빤히 바라보던 한가을은 묘한 예감에 휩싸였다.
“네.”
그리고 아직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인 액정을 힐끗 바라보던 남자가 대신 통화 버튼을 터치해 주었다.
다음 순간, 벨소리가 때마침 그의 주머니에서 울리고 그 화면을 한가을에게 보여주던 남자는 허리를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추더니 싱긋 웃어 보였다.
“만나서 반가워. 난 네 오빠, 강현우라고 해.”
“...”
한겨울은 말없이 자신을 그녀의 오빠라고 주장하는 지나치게 잘생긴 남자와 그를 보필하는 듯한 수많은 외제차와 집사들을 둘러보곤 겨우 말했다.
“저희 부모님은 시골에서 어렵게 사신다고...”
당연하게도 한가을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의 가족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 우리 집이 산속에 있는 건 맞지.”
잠깐 멈칫하던 그가 한 마디 더했다.
“근데 그 산 전체가 다 우리 거야.”
“네?”
‘그러니까 내 친부모가 가난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선산 하나를 가지고 있으며 이 정도 집사와 차량들을 거느릴 정도로 재력가다? 이게 말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