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한가을이 말을 마쳤을 때 표정이 차분했던 강기태도 순간 멍해졌다.
마치 한가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방을 바꾸자고 한 말인데 왜 나가서 살겠다는 거지?’
옆에 있는 강우진과 다른 사람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들도 한가을이 사소한 일을 ‘떠들썩하게 굴고 있다고 생각했다.
“굳이 그럴 일이야?”
별 것도 아닌 일로 말이다.
강우진은 경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강씨 가문에서 가출은 통하지 않아.”
강우진은 한가을이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강씨 가문은 한씨 가문과 달리 해성시 최고의 재벌 가문이기 때문에 한가을이 기꺼이 떠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옆에 있는 김영애도 말리는 척했다. “가을아, 네가 잘못한 데 대해 네 아빠가 살짝 뭐라고 한 거 가지고 왜 가출까지 하겠다고 그래? 너도 한 성깔하는 애구나.”
그런데 이때 강기태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제 강우진이 한가을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는 사춘기 소년인 강우진이 갑자기 나타난 누나가 적응되지 않아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강우진뿐만 아니라 강우주, 김영애도 한가을에 대해 친절하지 않았다.
자신 앞에서도 이런 식으로 한가을에게 말하는데 그럼 자신이 없을 때는 더 하지 않겠는가?
“가을아, 너...”
눈살을 찌푸린 강기태는 한가을에게 똑똑히 묻고 싶었지만 한가을은 더 이상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는 것 같았다.
한가을이 갑자기 돌아서서 방에 대고 부르자 흰색의 포동포동한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나 그녀의 품에 뛰어들었다.
한가을은 여우를 안고 조금 전 월세방에서 가져온 가방을 들고는 뒤돌아서서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제야 강기태는 조금 전에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다급히 손을 뻗어 한가을을 붙잡았다.
“가을아, 혹시 기분 나빴다면 말을 해도 돼. 그렇게 감정적...”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하지만 한가을은 차분한 표정으로 강기태를 바라보았다.
“저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한가을은 포기했다.
혈연이 자신에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고 있었다.
지난 18년 동안 한씨 가문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가족의 사랑을 어찌 강씨 가문에서 느낄 수 있을 거라 바라겠는가.
강현우는 진심으로 한가을을 받아들일지 몰라도 강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잘 지낼 수 없다면 빨리 관계를 끊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한씨 가문의 족쇠에서 벗어났으니 앞으로는 반드시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었다.
한가을은 여우를 안은 채 뒤돌아보지 않고 망설임없이 강기태 옆을 지나갔다.
“이런... 사고를 치고 도망가다니, 너무 무책임하잖아.”
강우진은 한가을이 정말 말한대로 떠나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러자마자 옆에 있는 강기성이 손바닥으로 강우진의 머리를 내리쳤다.
“네가 뭔데 끼어들어. 맨날 말은 많아 가지고. 당장 입 다물어!”
강우진은 아버지에게 맞자 그제야 조용해졌다.
반면에 조금 전부터 조용했던 강현우는 한가을이 떠나는 것을 보고 쫓아갔다.
한가을은 강현우가 자신을 붙잡으려고 따라온 줄 알았는데 강현우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집사에게 한가을을 집까지 데려다 줄 차를 대기시켰다.
강현우의 얼굴에는 한가을에게만 보여주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너 잘못한 거 없어.”
한가을은 당황했다.
“집에 오자마자 계속 참으면 사람들은 너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앞으로 더 지나친 행동들을 할 거야. 지금처럼 처음부터 네 태도를 확실하게 보여줘야 사람들이 함부로 괴롭히지 않을 거야.”
강현우는 한가을의 태도에 위안이 되는 듯 말했다.
놀란 한가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현우는 한가을이 나가서 살겠다는 말한 것을 그저 태도 표시라고 생각한 건가?
하지만 한가을은 정말 나가서 살 생각이었다.
그래서 서둘러 설명하려고 했다. “전 그런 게 아니라...”
하지만 강현우가 온화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내가 블루밍 오피스텔에 집이 있어. 거기 가서 며칠 지내. 내가 도우미 아줌마를 보내서 매일 청소하고 밥도 하라고 할게. 그러니까 넌 걱정하지 말고 거기 있어.”
그리고 실눈을 뜨고 이어서 말했다. “오늘 일은 오빠가 잘 해결해 줄게.”
한가을은 강현우의 진지한 눈빛을 보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강현우의 모습이야말로 오빠의 정석일 것 같았다.
그래서 한가을은 강현우가 오빠여서 좋았다.
고개를 살짝 숙였는데 강현우의 손이 그녀의 머리 위에 살짝 닿자 그 따뜻함이 한가을을 안심하게 만들었다.
“넌 내 동생인데 다른 사람들이 그걸 인정 안 하면 어떻게든 받아들이게 만들어야지. 내가 정신 교육을 시키더라도 인정하게 만들 거야.”
강현우가 말할 때 입가에 그 만의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매력 가득한 눈빛에는 위험한 기운도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한가을은 강현우가 웃으면서도 한편으로 그의 사촌 형제들을 어떻게 혼내줄 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가을은 침을 삼키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사실 강현우가 강씨 가문 사람들을 혼내주는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다.
한가을은 잠시 고민하더니 여우를 차에 태우고 가방에서 복주머니 두 개를 꺼내서 강현우에게 건넸다.
“제가 직접 만든 호신 부적인데 원래는 오빠랑 그분께 드릴려고 했어요.”
그분은 당연히 강기태를 가리킨다.
하지만 조금 전의 상황을 겪고 한가을은 직접 전해주기 싫어서 강현우에게 부탁했다.
강현우는 한가을이 호신 부적을 직접 만들었다는 것을 듣고 매력적인 눈을 깜빡이다가 웃으면서 건네 받았다. “항상 잘 갖고 다닐게.”
그러자 한가을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탔다.
강현우는 제자리에 서서 차가 멀리 떠나가는 것을 보고 난 뒤에야 천천히 뒤돌아섰다. 원래 미소가 걸려 있던 얼굴은 그가 뒤돌아서는 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대신 차가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별장 거실에서 강기태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강현우가 혼자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가 한가을을 남으라고 설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강기태는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가을이가 남지 않으려고 했어?”
하지만 강현우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곧장 강기태의 앞으로 가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제가 오늘 있었던 일의 과정을 아버지께 자세하게 설명드려야 할 것 같네요.”
이때 강우진과 사람들은 강현우의 차분한 말투를 듣고는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
차 안에서 한가을은 더 이상 강씨 가문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가방에서 부적 한 장을 꺼냈다.
한가을은 확실히 자신이 강씨 가문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빨리 발각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찾아가서 말을 몇 마디 했다고 송씨 가문은 두 가문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강기태를 찾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송씨 가문이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송하윤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