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나는 머리가 다시 윙윙거리며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기운이 다시금 느껴지게 되자 나는 힘겹게 설명을 이어갔다.
“저는 내연녀가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아니라니요?”
가영은 언성을 높였다.
“당신이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육하준을 꼬시고 다녔던 거 아니에요? 그게 내연녀가 아니면 뭔데요? 당신이 나타나서 육하준하고 진교은 언니가 헤어지게 된 거예요. 알기나 해요!”
“그런 거 아니에요... 소희가 아니라고 했어요.”
도소희는 그 당시 육하준하고 진교은이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내가 열렬한 구애 공세를 펼쳤다고 했다.
그러니 나는 내연녀도 아니고 그럴 일도 없다.
그런데 이 말을 내가 왜 이 사람한테 설명하고 있는 거지?
기억을 잃은 마당에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조차 모르고 있는데 말이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식은땀이 멈추지 않고 있다.
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오후에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건데 괜히 이 집에 들어와서 이딴 욕을 먹고 앉아 있으니!
가영은 내가 귀를 감싼 채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 걸 보자 대뜸 다가와 나를 세게 밀쳐버렸다.
워낙 머리가 어지러워 제대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던 나는 그 힘으로 인해 땅바닥에 넘어지게 되었다.
가영은 계속하여 욕을 퍼붓고 있었다.
“유상미! 넌 뻔뻔스러워! 가여운 척하면 누가 불쌍하게 여길 줄 아나 보지? 외모하고 집안 배경 말고 네가 가진 게 뭐라도 있어? 넌 그냥 멍청하기 짝이 없는 여자야!”
“진교은 언니와 천지 차이라고! 그런데도 너는 줏대도 모르고 언니한테 누명을 씌운 것도 모자라 모욕까지 일삼았어! 언니가 하마터면 너 때문에 자살할 뻔했었다고!”
그녀는 쉴 새 없이 욕을 하고 있었다.
말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워 구역질이 나고 있었다.
나는 가영이 제발 이대로 입을 다물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가영 씨! 그만해요!”
갑작스런 나의 비명소리에 가영은 입을 다물었고 그제서야 나는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곧이어 누군가가 나를 바닥에서 들어 올려 침대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결국 참을 수가 없었던 나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겨 와구와구 토해 버렸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욱 심각했다.
온 천지가 어두컴컴하고 콧물, 눈물이 넘쳐 나오며 오장육부를 다 토해낸 기분이었다.
그러나 상대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했다.
“괜찮아, 괜찮아, 힘들며 토해도 돼...”
가영은 충격을 입은 듯했다.
“왜 이래? 연기하는 거 아니야? 나 힘껏 민 거 아니야. 그냥 살짝 밀친 건데 바닥에 쓰러진 거라고.”
목구빈의 싸늘한 말투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에 부상을 입었기도 하고 뇌진탕 후유증도 있어. 그런데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으니까 좋을 리가 없잖아. 지금 당장 방으로 돌아가서 내 허락 없이 나올 생각하지 마.”
가영이 답했다.
“오빠!... 나 안 가! 응당 나가야 할 사람은 저 여자잖아!”
목구빈의 말투는 냉담했다.
“아주머니, 가영이 짐을 싸 주세요. 그리고 이따가 황해 산장에 데려다주세요.”
가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빠, 지금 나더러 호텔에 가서 지내라는 거야! 이 여자 때문에 나를 내쫓아...”
지저분해진 방 안팎으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들어줄 겨를이 없었다.
하인은 가영을 끌고 나갔고 나는 계속하여 토하고 있었다.
결국 토할 만큼 다 토를 하고 나자 겨우 눈을 뜨고 눈앞의 그 남자와 시선이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구빈 오빠, 나 그냥 입원해 있을래. 이 모양으로... 오빠 방만 어지럽히겠어.”
목구빈은 나를 부축하며 고민에 잠긴 듯했다.
키가 훤칠한 그는 나를 하늘하늘 날리는 깃털처럼 품에 안고 있었다.
심한 현기증으로 사방을 관찰할 수가 없는 나는 지금 큰 방에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방 안에는 옅은 소나무 향기가 나고 있었고 그는 나를 큰 침대에 눕혀주었다.
그렇게 침대에 마치 죽은 지 오래된 물고기같이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목구빈은 방 안에서 바삐 움직이다 한참이 흘러 따뜻한 수건을 내 얼굴에 대더니 누군가가 꼼꼼히 닦아주고 있다는 걸 느꼈다.
눈을 떠 보니 목구빈의 도도한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