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그의 물음에 말문이 막힌 나는 목이 메었고 겨우 숨을 돌린 뒤 말을 이었다.
“악명이 높은 건 맞아요. 괜히 오빠한테 폐를 끼칠 수는 없잖아요.”
그와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허나 목구빈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 얼른 들어가자. 일단 지낼 곳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는 앞장서서 걸어갔고 나는 잠깐 망설이다 그의 뒤를 따라갔다.
...
저택은 고요하기 그지없었고 하인들은 질서 정연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이 장소가 편안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육하준의 텅 빈 별장보다 여기는 사람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으니 말이다.
페인트가 조금 벗겨진 원목 책꽂이에 가장자리에 검은 숯불 자국이 나도록 만든 미국식 벽난로와 관리가 잘 된 큰 소파가 놓여져 있었다.
나는 소파에 얌전히 앉아 옷을 갈아입으러 간 목구빈을 기다렸다.
머릿속은 텅 빈 채로 아무런 생각이 들어있지 않았다.
여기에 오게 된 이 하루가 꿈만 같았다.
이렇게 쉽게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육하준한테서 벗어난 건가?
목구빈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옅은 회색 실내복과 날씬한 바지는 그의 훤칠한 키를 돋보였다.
헐렁헐렁한 상체의 의상으로 인해 친근감을 더했고 그 뒤로는 그의 넓은 어깨와 좁은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의 목구빈은 양복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더 잘생겨 보이는 게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목구빈은 그런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봄처럼 따뜻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힘들지 않아?”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목구빈은 내 맞은편에 앉아 소개를 하고 있었다.
“여긴 우리 집안 저택이야. 조금 낡기는 해도 방은 많아.”
그는 멈칫하다 말을 이었다.
“부모님은 스위스에서 휴가를 보내는 중이고 동생 둘은 아직 해외에 있어. 방금 네가 본 가영이는 내 사촌 동생이야. H대 예술학교에 진학하려고 이번 달 교수를 찾아 전문 강습을 할 거거든.”
나는 더욱 난감해졌다.
“오빠, 나 괜찮아. 그냥... 하룻밤만 자고 내일 나갈 거야. 나 혼자서도 지낼 수 있어. 호텔 잡으면 돼...”
비록 뒤늦게 나한테 선택지가 많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정신이 팔린 채로 목구빈을 따라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내가 한 말들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 기분이었다.
목구빈은 가볍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가 혼자 호텔에 묵는 게 마음에 놓이지 않아서 그래. 진 어르신도 삼일 정도 침을 맞아야 한다잖아. 자주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야 하기도 하니까 일단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
그는 잠시 멈칫하다 재차 입을 열었다.
“여기가 싫으면 다른 거처를 마련해 줄게.”
나는 즉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여기가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목구빈은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미소를 머금었다.
“상미야, 넌 자주 얼굴이 빨개지네.”
나는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나도 모르겠어요. 막 깨어났을 때는 기억을 잃었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 나이는 열여덟 살이거든요.”
열여덟 살 때의 나는 연애에 막 궁금할 나이였다.
순진한 그 마음으로 목구빈 같은 우수한 남자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심지어 육하준 같은 쓰레기와 마주할 때마저도 솔직히 벅찬 감이 든다.
7년이라는 기억을 상실했으니 성인으로서의 여유를 잃은 거나 다를 바가 없을 테니 말이다.
지금의 나는 분명 스물다섯 살이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 백지와도 같다.
목구빈은 고민에 잠겼다.
“그렇구나. 열여덟 살 전에 일만 기억한다는 거지. 그럼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은?”
나는 체념을 했다.
“다 잊어버렸어요.”
그 말을 하고 나는 그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오빠, 제 말 믿어요?”
나는 그가 한 치라도 망설일까 두려웠다.
왠지 모르게 그가 조금이라도 망설이게 되면 엄청나게 실망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기억을 잃고 난 뒤로 도소희를 제외하고 나한테 잘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목구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눈이 사르르 녹는 듯한 미소다.
“나무 오빠는 우리 상미를 믿어.”
나는 그를 따라 빙그레 웃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그는 내가 감동할 시간도 채 주지 않고 밥부터 먹으라며 재촉하고 있었다.
목씨 가문의 하인이 만든 저녁은 생선과 고기, 토마토 계란 볶음 등으로 담백한 차림이었다. 내가 상상하던 진수성찬은 아니었다.
목구빈은 백반 두 젓가락, 반찬 한 젓가락, 어쩌다 국물 한 모금을 마시며 우아하게 밥을 챙겨 먹고 있었다.
밥을 먹으며 그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나하고 대화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밥을 반쯤 먹었을 때쯤 그 소녀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묻고 싶었으나 말을 내뱉을 수가 없으니 목구빈을 힐끔거렸고 그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해 보였다.
그렇게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식사를 마친 그는 거실로 걸어가 뉴스를 읽기 시작했다.
속도가 느려졌다는 걸 발견한 나도 빨리 식사를 마치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목구빈이 물었다.
“배불렀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영 씨는? 안 먹어도 돼?”
목구빈은 미소를 보였다.
“다 큰 어른이 배고프면 알아서 밥 먹으러 내려올 거야. 걱정하지 마.”
그는 하인들한테 내 방을 정리하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주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나한테 말을 건넸다.
“오늘 저녁은 푹 쉬어. 내일 여덟 시에 같이 병원에 가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혼자 갈 수 있어요.”
목구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나하고 같이 가.”
뭐라 더 말하려고 하는데 목구빈은 업무를 처리하러 휴대폰을 들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하인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
목씨 저택의 방이 하도 많아 3층으로 올라갔는데도 양쪽을 합치면 적어도 열 개의 방이 준비돼 있었다.
나는 혀를 내둘렀다.
기억 속에서 우리 집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게 바로 전설 속의 명문가 저택이라는 건가?
목씨 저택은 새로운 사업가인 육하준 저택보다 레벨이 훨씬 높아 보였다.
필경 육하준의 명의 하에는 부동산이 그리 많지 않은 듯했으니 말이다.
그는 윗분들부터 대대로 명문 집안인 목구빈의 고귀한 자태가 부족하다.
하인은 예의 있게 나를 객실로 데리고 갔다.
방문을 열자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넓어!
여긴 객실이 아니라 방 3개에 거실이 하나 달린 오피스텔에 흡사하다!
입구 왼편에는 화장실이었고 안으로 들어가 보면 크고 작은 옷방에다 옷방 옆에는 1미터 80센티미터의 큰 침대가 놓여져 있는 침실이 위치해 있었다.
전체 방의 컨셉은 웜톤이었다.
나무 무늬의 바닥, 흰색 바탕에 옅은 노란색 벽지가 붙은 벽. 순수한 아메리칸 오크 베드의 침대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