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쪽지에 적힌 내용을 본 심민아는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세상 물정 몰라야 하는 5살짜리 아이가 벌써 철 든 것이 안쓰러웠다.
“수연이가 없어졌다고? 그러면 빨리 찾으러 가야지!”
그녀가 막 일어서려는 순간 박지훈이 그녀를 밀쳤다.
“모르는 척하지 마! 수연이한테 무슨 얘기를 했길래 애가 가출까지 해? 어제 이상하게 굴던 것도 결국 개자식 딸 살리려고 수연이 골수를 뽑으려는 속셈이었잖아!”
박지훈은 충혈되어 새빨갛고 증오 가득한 시선으로 심민아를 노려봤다.
박진호는 격앙된 아들을 안아 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심민아, 나는 아이들이 걸린 문제에서 절대 참지 않아. 만약 수연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방성훈을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야.”
그는 진작부터 방성훈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늘 목숨으로 협박했기 때문에 손쓸 수 없었다. 방성훈을 건드리면 자신도 바로 죽어버리겠다고 말이다.
실제로도 방성훈 때문에, 그녀는 수도 없이 자해하고 자살 소동을 벌여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심민아는 해명하지 않았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중요한 건 박수연을 찾는 일이었다.
그녀의 침묵에 박진호는 묘한 불안을 느꼈다. 전에는 방성훈의 이름만 꺼내도 곧장 감정이 폭발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물건을 부수며 자신을 원망했는데, 오늘은 지나치게 잠잠했다.
그는 혹여 그녀가 또 자해라도 할까 봐 떠나기 전 집안사람들에게 잘 지켜보라고 당부했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고 말이다.
차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침내 박진호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너 자꾸 그러지 마. 어쨌든 네 엄마잖아.”
박지훈은 입술을 꾹 다물고 5살 아이답지 않은 깊은 고통이 어린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엄마? 나랑 수연이를 제 자식으로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야.”
그녀는 그와 박수연을 싫어했고, 태어난 것 자체를 원망했다.
그도 한때 박수연처럼 어머니의 사랑을 갈망해 봤다. 하지만 돌아온 건 역겹다는 말뿐이었다.
운전석에 있던 비서가 전화를 받더니 뒤돌아 박진호를 봤다.
“아가씨를 찾았습니다. 지금 병원에서 골수 이식 수술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말을 흐리는 비서를 보며, 박진호는 눈빛을 굳혔다.
결국 비서가 말을 덧붙였다.
“사모님도 병원에 계십니다...”
...
심민아는 임미정 덕분에 박수연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수술실 앞에 앉아 있는 조그만 박수연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곁에는 긴 웨이브 머리를 한 강소라가 서 있었다.
“이모, 제가 서현 언니를 살리기만 하면 엄마가 떠나지 않는 거죠?”
“당연하지. 네 골수를 주면 내 딸을 살릴 수 있고, 그러면 네 엄마도 네 아빠랑 이혼 안 할 거야. 골수 기증은 피 뽑는 거랑 비슷해.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네 엄마 잃고 싶지는 않지?”
강소라는 5살짜리 아이를 교묘하게 구슬렸다. 골수 이식이 어른에게도 위험한 수술이라는 건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녀로서는 자신의 딸만 살리면 됐고, 심민아의 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안돼!”
“심민아?!”
강소라는 고개를 돌리다가 심민아가 다가오는 걸 보고는 한낮에 귀신이라도 본 듯 얼굴이 창백해졌다.
‘심민아가 아직 살아 있었어?’
“엄마, 수연이는 뭐든 할 수 있어. 제발 떠나지 마...”
박수연은 그녀가 화낼까 봐 울먹이며 조그마한 손으로 옷자락을 꼭 붙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 심민아의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릎을 굽혀 아이의 눈물을 살며시 닦아 주었다.
“수연아, 걱정하지 마. 엄마는 너희를 떠나지 않아. 근데 지금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수연이는 눈 감고 100... 아니, 500까지 세 줄 수 있겠어? 아, 5살한테 500은 너무 어려운가.”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박수연은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도 안 어려워, 엄마! 수연이 바보 아니야. 수연이 진짜 똑똑해!”
심민아가 자신을 멍청하게 볼까 봐 착한 아이는 애써 부인했다.
“그래, 엄마도 수연이가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해. 그러면 지금부터 세 보자.”
심민아는 박수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은 뒤 손을 꼭 쥐고 몸을 가볍게 풀었다.
“수연이가 500까지 셌을 때, 엄마 사라지면 안 돼.”
박수연은 울먹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 사라져. 엄마랑 약속.”
심민아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박수연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이는 엄마 믿어.”
아이는 인형을 꼭 안은 채로 순진한 목소리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심민아는 다시금 이어폰을 씌워 아이가 주위 소리를 못 듣게 한 뒤, 높이 묶은 머리를 정리하고 강소라의 풍성한 웨이브 머리를 움켜쥐어 앞으로 잡아당겼다.
짝! 짝!
거침없는 타격이 강소라 입 주변에 연속으로 꽂히더니 금세 돼지주둥이처럼 부어오르게 했다.
“네가 감히 나를 때려?!”
“왜? 너를 때리는 데 무슨 허가증이라도 받아야 해?”
18살의 심민아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받은 만큼 그대로 되돌려 주는 성격이었다. 이런 뻔뻔한 여자는 주먹으로 길들여야 한다고 믿었달까.
얼마 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방성훈이 본 광경은 이랬다. 강소라는 반쯤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고, 심민아는 그녀를 밟고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찔하게 치켜올린 그녀의 눈매에는 오만하면서도 우아한 기세가 감돌았다. 마치 붉은 장미처럼 화려하고 도도하기까지 했다.
이 모습이야말로 예전의 심민아였다.
한때 그가 놀라울 정도로 매료되었던. 자존심 강하고 도도했던 심씨 집안의 큰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