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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여름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입사해서 한 번도 ‘회장님댁 아가씨’ 노릇을 한 적이 없다. 그저 부지런히 일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들 퇴근해도 자신은 남아서 야근을 하고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대했다. 그런데 이런 엔딩을 맞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회사에서 나와 바람을 쐬며 혼자 걸었다. 한선우가 몇 번인가 전화를 걸어왔지만 받고 싶지 않았다. 마트에 가서 간식거리와 식자재를 사서 그대로 컨피티움으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서니 지오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뛰어나왔다.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오를 내려다보았다. “인제 날 좋아해 주는 건 지오 밖에 없네.” 지오가 ‘야옹~’하며 편안한 듯 눈을 감고 여름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 지오가 웃었다. “멸치가 먹고 싶구나? 알았어, 해주지.” 점심에 최하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름은 지오와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소파에 앉아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최하준은 10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아직 집이 환했다. 여름은 소파에 앉아서 지오 입에 소시지를 넣어주고 있었다. “내가 없으니 애한테 그런 정크푸드를 먹이는 겁니까?” 쌀쌀맞은 최하준의 시선이 테이블에 있는 각종 간식거리로 향했다. 감자 칩, 닭발, 닭꼬치, 쥐포⋯. 지오의 입가에 뭔가 양념이 묻어있는 것도 같았다. “그냥 맛만 보여준 거예요. 아주 조금만.” 여름이 소심하게 손가락으로 아주 작은 양을 재보이는 시늉을 했다. “지오가 너무 덤벼서 어쩔 수 없⋯.” “고양이가 뭘 압니까. 다 사람이 알아서 조절해 줘야지.” 최하준은 화가 나서 테이블의 간식거리를 싹 치웠다. “앞으로 집에서 이런 정크푸드 금지입니다. 이런 냄새도 싫습니다.” 여름은 속상했다. ‘세상에 간식 냄새 싫다는 사람이 다 있네. 변태인가⋯.’ 그러나 여름은 어쩔 수 없이 비위를 맞추며 웃었다. “당신 말이 맞네요, 쭌. 앞으로는 이런 거 안 먹을게요.” “거울이나 보시죠.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최하준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고양이를 안고 안방으로 가버렸다. “배고프지 않아요? 국수라도 좀 끓일까요? 나 국수 잘 끓이는데!” 여름은 넉살 좋게 총총 따라갔다. 최하준이 멈칫했다. 밖에서 고객과 밥을 먹기는 했지만, 메뉴가 너무 매운 것뿐이라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런데 마침 국수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동했다. 관심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여름이 얼른 말했다. “물 올릴게요. 샤워하고 나오세요.” 최하준이 돌아보았다. 오렌지색 조명을 받은 여름은 한결 더 따스하게 보였다. 여름은 15분 만에 맑은 멸칫국물에 잔치 국수를 끓여서 들고 안방까지 갔다. 똑똑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국수 다 됐어요.”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욕실의 뿌연 유리로 남자의 희미한 모습이 비칠 뿐이었다. 멍하니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옷을 벗은 남자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생각할수록 얼굴이 빨개졌다. ‘어머, 멈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여름이 막 돌아서는데 벌컥 욕실 문이 열렸다. 욕실에서 나온 최하준은 허리에 타월만 한 장 걸치고 있었다. 머리를 안 말리고 나온 바람에 머리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얼굴을 타고 가슴까지 흘러내렸다. 여름의 시선이 물방울을 따라 내려가다가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근육질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근사할 줄은 몰랐다. 피부는 딱 좋을 정도로 그을었고, 근육은 선명했지만, 너무 우락부락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아름다웠다. 성숙한 남자만의 매력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리니 탄탄한 허리가 보였다. “다 봤습니까?” 머리 위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릴 때부터 미남인 한선우를 보고 자란 데다 남자의 볼 꼴 못 볼 꼴을 다 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의 몸을 보고는 이렇게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걸까⋯. ‘어이구. 못났다, 정말⋯.” “그, 그게 국수 가져왔는데요. 얼른 드세요. 불면 맛없어요.” 여름은 국수를 놓고 후다닥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서두르다가 그만 러그에 발이 걸렸다. 몇 걸음 비틀거리다가 그만 엎어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 뭔가를 잡는다고 잡았는데 그것도 같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여름은 다행히도 러그 위로 넘어져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런데 눈을 뜨니 앞에 늘씬한 두 다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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