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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0화

하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 송영식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준의 눈이 서서히 싸늘해지는 것을 보며 여름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사람에게 흔들렸었다니. 그 수많은 일을 겪고도 난 아직도 남의 말을 너무 잘 믿는단 말이야. 저 사람은 내가 필요할 때는 입으로 어떤 말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한 마디만 물어볼게. 어떻게 해야 민관이를 풀어줄 거야?” 여름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놓아줘?” 송영식이 우습다는 듯 말했다. “꿈 깨시지. 지안이를 그렇게 괴롭힌 인간은 죽도록 고통을 당해 봐야 해. 겨우 보디가드에게 그렇게 촉을 곤두세우다니 둘이 무슨 관계인데 그러지?” “말 함부로 하지 마시지.” 여름의 분노에 찬 경고가 끝나가 하준의 차가운 눈동자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여름은 속으로 송영식을 오천만 번 저주했다. “풀어달라? 가능하지.” 하준이 매서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죽으면 풀어줄 수 있어.” “나랑 민관이는 결백해. 아무 말이나 내뱉는 송영식의 말은 믿고 당신과 한 베개를 베고 누웠던 내 말은 못 믿겠다는 거구나. 알겠어.” 여름은 눈을 내리깔아 속눈썹으로 눈에 어린 살기를 감추었다. 하준은 그 모습을 보니 심장을 칼로 에는 듯 아팠다. ‘날 겨우 그런 놈으로 보는 건가? 어째서 육민관을 구하지 못해서 저렇게 목을 매는 거야?’ “강여름, 너무나 실망스럽군. 난 당신이 그렇게 못된 인간인지 몰랐어.” 그런 소리는 송영식에게 수도 없이 들었지만 여름은 신경도 써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여름은 어쩔 수 없이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내가 못됐다고? 3년 전에도, 3년이 지나도, 여전히 눈이 멀었군. 아직도 백지안의 가면 뒤 얼굴이 안 보인단 말이야?’ “지금 웃음이 나와?” 송영식이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너무 웃겨서.” 강여름은 눈가의 눈물을 닦더니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거기 서!” 송영식이 바로 손으로 여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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