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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강이준은 분노를 억눌렀다. “시연아, 무얼 하든 상관없지만 내 곁에서 떠나는 것만큼은 절대 안 돼. 잘 생각해 보고 다시 찾아와서 얘기해. 그럼 오늘 있었던 일은 눈감아 줄게.” 이시연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람은 본인이 피우고 정작 남이 용서를 구하기를 바라다니? 그녀는 쌀쌀맞게 팔을 빼냈다. “마음대로 하든가. 어차피 너랑 할 말 없어.” 그러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이준의 그윽한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던 서준태는 이시연 사태를 처리할 좋은 아이디어가 문득 떠올랐다. 유정 엔터테인먼트 대표는 말할 것도 없고, 이엘 그룹 대표는 더더욱 건드릴 엄두가 안 났다. 하지만 시한폭탄을 곁에 두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시연이 제 발로 떠나게 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생각을 마치는 순간 주인공이 나타났다. 이내 커다란 배를 내밀고 반갑게 맞이하며 자리에 앉혔다. “시연 씨가 일 잘한다는 걸 회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 그동안 강이준을 따라다니며 성과도 많이 냈지만 고생 또한 적지 않았잖아? 우리 회사 직원으로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이시연은 입을 꾹 닫고 상대방이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말인데 신인 두 명 붙여줄 테니까 한 번 맡아봐.” 그녀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매니저를 해본 적이 없어서 감당할 수 있나 모르겠네요.” “에이, 스스로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 지금의 강이준이 되기까지 전부 시연 씨의 공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어떻게 보면 본인을 상징하는 명함과 마찬가지인데 난 잘 해낼 거로 믿어.” 서준태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연출과 촬영에 소질이 있는 편이죠.” 연출을 전공한 이시연은 취미로 촬영도 했고, 둘 다 그녀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비록 강이준을 따라다니는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거의 손을 놓다시피 했지만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특히 최근에 강이준의 매니저를 관두면서 여러 제작팀에 합류해서 촬영을 담당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마침 잘됐네.” 서준태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 곧 촬영할 작품에 그 두 신인을 보냈거든. 비록 분량이 많지 않지만 감독님이 무려 명성이 자자한 홍준오라서 이보다 더 좋은 학습 기회는 없을 텐데? 지인에게 부탁해서 시연 씨도 제작팀으로 일하게 해줄까? 조감독 정도면 괜찮지?” 고작 이런 말에 속아 넘어갈 거로 생각했다니? 이시연은 조소를 금치 못했다. 이내 본인도 터무니없는 제안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서둘러 정정했다. “물론 난이도는 좀 있지. 하지만 수습으로 합류하는 건 문제 없을 거야. 어쨌거나 현재로서 무언가를 배우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수습은 툭 까놓고 말하면 심부름꾼에 불과했다. 쥐꼬리만 한 페이를 받으며 제일 힘든 일을 도맡아 할 뿐더러 일이 터지면 누명을 뒤집어쓰기 일쑤고 욕받이 신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홍준오 감독과 인연만 맺을 수 있다면 썩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머릿속으로 득실을 따져보는 와중에 서준태는 그녀가 망설이는 줄 알고 있었다. 이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이시연의 얼굴을 보고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거절하기 전에 생각 좀 해 봐. 아직 촬영일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보름 동안 유급휴가를 줄게. 어때?” 이시연은 미간을 문질렀다. 현시점에서 휴식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는 순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쉬고 난 다음 돌아와서 신인을 맡을지 생각...” 하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준태가 끼어들었다. “그래! 일단 두 신인을 담당하는 거로 알고 있어. 역시 시연 씨는 야무지다니까? 어쩐지 강이준이 꽉 붙잡고 놓지 않는다고 했더니...” 곧이어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얼버무렸다. “이 입이 방정이네. 하여튼 집에 가서 푹 쉬고 나중에 복귀해서 멋진 성과를 이루는 날이 오기를 기대할게.” 결국 이시연은 강제로 일을 떠맡은 셈이었다. 곰곰이 따져보면 크게 어려울 건 없었다. 어쨌거나 강이준이 데뷔했을 때 회사에서 지정해준 매니저는 훨씬 더 잘나가는 연예인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모든 업무는 그녀가 전적으로 처리하다시피 했다. 결국 매니저 취급도 못 받으면서 온갖 잡일까지 도맡았다. 나중에 명성을 얻고 나서야 회사 측에 매니저의 직함이라도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육 대표님이 어쩌고저쩌고, 설마 자기 탓은 안 하겠지 하며 중얼거리는 서준태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지만 제대로 듣지 못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 쉬려고 했다. 회사 건물을 나서자 육성재가 타고 다니던 검은색 마이바흐가 눈에 들어왔다. 김정우가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시연은 금세 택시 어플을 껐다. “김 비서님이 여긴 어쩐 일이죠?” “대표님께서 저녁을 같이 드시자고 하네요. 지금은 급한 회의 때문에 저한테 대신 픽업 다녀오라고 했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탔다. 뒷좌석에는 육성재의 양복 외투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이내 손으로 쓸어내리는 순간 어젯밤 욕망으로 얼룩진 남자의 눈동자가 머릿속에 느닷없이 떠올랐다. 이시연은 감전이라도 된 듯 황급히 손을 뗐다. “김 비서님, 혹시 삼촌 요즘 연애해요?” “네?!” 화들짝 놀라는 김정우 때문에 그녀도 덩달아 움찔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고 말을 이어갔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죠. 대체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전해 들은 거예요?” 이시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물론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그냥 삼촌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맨날 붙어 다니는 김 비서님도 모르시면 어디까지나 제 착각일 가능성이 크겠죠.” 김정우는 머리를 빠르게 굴리며 혹시라도 놓친 건 없는지 곰곰이 되새겼다. 정작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모습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반면, 이시연은 쓸데없는 질문이라도 받을까 봐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그리고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직접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워낙 입이 무거운 사람인지라 어차피 물어봐도 무용지물일 게 뻔했다. 육성재는 그녀와 함께 저녁을 먹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전혀 강제로 키스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마음이 심란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비록 혈연관계가 있는 가족은 아니지만 항상 그를 친척으로 여겼다. 육성재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너무 피곤하면 며칠 쉬었다가 다시 일 생각해.” 잔잔한 목소리는 적당히 여유가 있고 다정한 느낌도 들었다. 이시연은 고개를 들고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웃음을 쥐어짜 냈다. “회사에서 보름 동안 휴가를 줬는데 내일 선생님을 찾아뵐까 고민 중이에요.” 그녀의 스승인 김건국은 전 세계에서 유명한 감독이다. 영화계에 수십 년 동안 몸담으면서 제작했던 작품들은 각종 상을 싹쓸이했고, 현재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감독들도 전부 제자 출신이었다. 게다가 그동안 발굴한 연예인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60대에 접어들고 나서 직접 제작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 바닥에서 여전히 부동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이시연은 김건국이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강이준은 그의 영화 작품에서 조연으로 데뷔했는데 당시 두 사람의 패기 넘치는 모습을 좋게 봤었다. 처음으로 강이준을 만난 장소는 다름 아닌 선생님의 집이며, 어떻게 보면 김건국 부부가 두 사람을 이어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녀가 없었는데 둘 다 고아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친자식처럼 대했다. 나중에 강이준과 사귀게 되었을 때 선생님 내외는 그 누구보다 기뻐했다. 또한, 서로 사랑하며 함께 성장해가는 모습을 유일하게 지켜본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제 헤어졌으니 서운할 게 뻔하지만 비밀로 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그녀는 아침 일찍 김건국의 집으로 찾아갔다. “시연아,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와이프가 틈만 나면 강이준과 널 찾았어.” 문을 열자마자 그녀를 발견한 김건국은 얼굴에 주름이 생기도록 활짝 웃었다. 오늘 안여정이 털실로 직접 만든 듯한 조끼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정정해 보였다. 살집이 적당히 있는 얼굴에 상냥한 미소가 번졌다. 촬영 현장에서 봤던 진지하고 근엄했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이시연은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눈앞에서 활짝 웃는 남자를 보자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금세 입술을 깨물고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모 계세요? 오랜만에 얼굴도 뵐 겸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이 말을 들은 김건국이 대뜸 정색했다. “너랑 강이준에 관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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