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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이시연은 속상한 나머지 소파에 누워 어느새 꿈나라로 떠났다. 비몽사몽 한 와중에 얼굴을 만지는 느낌이 들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이어 희미한 술 냄새가 풍겨오더니 앞에 사람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거실은 어두컴컴했고, 창밖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이 실내에 어렴풋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육성재는 고개를 숙이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외투는 벗어둔 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고, 몸에 딱 맞는 셔츠는 탄탄한 몸매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이내 팔을 들어 늘씬한 손가락으로 옷깃을 풀어 헤치자 섹시하면서 도발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삼촌?”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술에 취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갑자기 술 마셨어요?” 소파에서 일어나 육성재를 부축해서 방으로 데려다주려는 순간 커다란 손바닥이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이시연은 화들짝 놀라 꼼짝도 못 했다. 그리고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남자는 문득 몸을 숙이더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결국 다리를 벌리고 마주 보고 앉아 품에 안기는 꼴이 되었다. 정말 죽을 맛이 따로 없었다. 육성재가 고개를 숙여 턱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지그시 누르자 따스한 숨결이 깃털처럼 피부를 간지럽혔다. 마치 연인들의 달콤한 스킨십에 몸이 점점 나른해졌고 서서히 온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시연은 머릿속이 뒤죽박죽 했다. 순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고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남자를 밀어냈다. 육성재는 그녀의 움직임이 못마땅한지 허리를 잡고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셔츠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가만히 있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마치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듯싶었다. 마법의 주문처럼 들리는 한 마디에 이시연은 야릇한 포즈를 취한 채 잠자코 있었다. 곧이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코앞까지 나타난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멈췄다. 가벼운 입맞춤이 점차 거칠게 변해갔다. 불덩이 같은 혀가 입술을 지분거리자 이시연은 온몸이 굳어버린 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남자의 뜨거운 손바닥이 옷자락을 파고들어 거침없이 피부를 어루만지는 순간 이시연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제야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발버둥 칠수록 남자는 더더욱 세게 끌어안았고 마치 한 몸이라도 될 기세였다. 이시연은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틀어 남자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따끔한 통증에 움찔하는 틈을 타서 재빨리 속박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켰다. 육재성은 얼굴을 찡그리더니 손을 뻗어 물린 부위를 감쌌다. 그리고 미간을 문지르며 서서히 이성을 되찾았다. “삼촌, 혹시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거 아니에요? 몰래 여자친구라도 사귀었어요?” 고개를 드는 순간 남자의 눈빛은 아직도 취기가 선명했다. “시연아?” 방금 어떤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쳤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고, 당연히 그녀가 했던 말도 듣지 못했다. 이시연의 가슴 속에 거친 파도가 일렁거렸고 만감이 교차했다. “삼촌.” 그녀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술에 취한 것 같으니까 얼른 씻고 자요. 나도 이만 방에 돌아갈게요.” 허둥지둥 도망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육성재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싸늘했고 차마 가까이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알코올은 의식을 마비시켜 찰나의 순간에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기에 이런 무능력한 느낌이 싫었다. 하지만 오늘 술자리에서 우연히 강이준의 시상식 해프닝에 대해 전해 듣게 되었다. 육성재는 현재 육씨 가문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17살에 가업을 이어받아 무려 3년 만에 이엘 그룹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격했다. 게다가 단호한 일 처리와 무자비한 수완으로 소문이 자자한지라 아무도 차마 건드리지 못했다. 비록 시시콜콜한 일에 불과하지만 평소 피도 눈물도 없는 이엘 그룹 대표마저 툭하면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다. 이시연은 심란한 마음에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웠다. 아까만 해도 강이준의 선을 넘는 행동과 일방적인 통보에 짜증이 가득했으나 지금은 머릿속에 육성재의 거칠고 부드러운 키스만이 남아 있었다. ‘미친! 네 삼촌이잖아!’ 이내 불결하고 더러운 생각을 지우려고 애를 썼다. 결국 밤새 뒤척이다 보니 다음 날 이시연은 컨디션이 최악이었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육성재가 깨어나기 전에 떠나려고 일부러 일찍 일어났는데 마침 아침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늦잠이라도 잘걸.’ 몰래 도망치려다가 딱 걸린 신세라 머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삼촌.” 기운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육성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이준처럼 무능한 자식에게 왜 끌리는 건지 당최 이해가 안 갔다. 물론 감정은 제어하기 힘든 법이다. 누구나 말 못할 비밀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밥 먹어.” 담백한 목소리는 어딘가 쌀쌀맞기도 했다. 하지만 무심하게 챙겨주는 그의 모습에 이시연은 문득 코끝이 찡했다. 배신감에 치밀어오른 울분은 마치 폭풍에 일렁이는 거센 파도처럼 그녀를 바닷속으로 집어삼킬 듯싶었다. 차마 붉어진 눈시울을 들킬 수 없는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육성재는 아침 식사를 챙겨서 앞에 내려놓았다. 거리가 가까운 탓에 남자의 몸에 풍기는 산뜻한 향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어젯밤 품에 안겨 강제로 키스 당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시연은 속상함도 잊은 채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삼촌,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요!’ 육성재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만졌다. “더워?” 손길이 닿는 순간 이시연의 머릿속에 천둥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이내 화들짝 놀라며 손을 쳐냈다. 어젯밤에도 지금처럼 다정하게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지만 눈빛만큼은 연인을 바라보는 듯 애정이 가득했다. 허공에 멈춰 있는 손을 내려다보는 육성재의 안색이 사뭇 어두웠다. 이시연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삼촌, 혹시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육성재의 손가락이 움찔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팔을 내리더니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죽을 한 모금 먹고 나서야 무덤덤하게 말했다. “왜? 할아버지가 너한테도 결혼 강요했어?”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잔소리하는 것도 다 삼촌을 위해서이죠.” 육성재가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이시연은 금세 입을 닫았다. “밥 먹고 나서 회사까지 데려다줄게.” 비록 거절하고 싶었지만 오늘 급한 일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순순히 대답했다. 회사에 도착하기 직전 육성재가 문득 말했다. “여기서 계속 일할 거야?” 문을 열려고 뻗었던 이시연의 손이 멈칫했다. “이미 알고 있었어요?” 상대방은 묵묵부답했다. 결국 망설임 끝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만 강이준과 만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집에서 가르친 교훈은 절대 잊지 않을 테니까. 감정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은 용납이 불가하죠.” 어느새 육성재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진 듯싶었다. “강이준이 어디가 좋아?” “음... 잘생겨서?” “외모 때문에?” 의혹이 가득한 얼굴에 이시연은 아차 싶었다. “물론 삼촌과 비교하면 발끝에도 못 미치죠.” 육성재가 피식 웃었다. “말이나 못 하면.” 이시연은 저도 모르게 따라서 웃었다. “사실을 얘기한 건데? 웃으니까 더 잘생겼어요. 평소에도 좀 더 상냥하게 대한다면 여자들이 삼촌한테 반할 확률은 100%죠. 바쁘실 텐데 얼른 일 보러 가요. 저도 회사에 강이준 소속팀에서 빠지겠다고 얘기하려고 해요. 정 안 되면 그만둘 생각이에요.” 육성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퇴사도 나쁘지 않아. 네 오빠들이 회사를 물려받기 싫어해서 나중에 한가할 때 업무에 관해 가르쳐줄게.” 이시연의 얼굴에 금세 수심이 가득했다. “삼촌, 그만 가보세요. 아직 정해진 것도 아닌데 회사는 일단 오빠들에게 맡겨요.” 비록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 기껏해야 육씨 가문의 양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동안 베푼 은혜만 해도 평생 갚을까 말까인데 어찌 감히 가업까지 눈독 들이겠는가? “시연아.” 이시연이 고개를 돌렸다. “회사에서 네가 원하는 조건을 들어주리라는 보장은 없잖아. 만약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가 대신 해결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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