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뭐라고?”
강이서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입고 싶다고 조른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말할 거면 옷 돌려줄게!”
그녀의 뺨에 짙게 발린 블러셔도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이시연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웃음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래, 돌려주겠다면 깔끔하게 돌려줘. 내가 사준 옷이며 액세서리 모두 가져오고, 내가 월세 내주는 집에서도 당장 나가. 나 지금 강이준이랑 헤어졌거든. 그러니 네가 굳이 내가 사준 물건이나 집에 남아 있을 이유 없잖아?”
강이서는 그녀의 말에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연애할 때는 그렇게 잘해주더니 헤어졌다고 바로 돌변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이래서 아라 언니한테 오빠를 빼앗긴 거야!’
그녀는 속으로 분을 삭이며 이를 악물었다.
박지호는 상황이 더 악화하기 전에 두 사람을 진정시키려 나섰다.
“이서 씨, 시연 씨, 둘 다 진정하세요. 같은 식구끼리 이렇게 싸우면 안 되죠.”
강이서는 박지호에게 그 화를 고스란히 퍼부었다.
“같은 식구는 무슨! 저 여자가 오빠랑 헤어진 거 못 들었어요?”
그녀는 다시 이시연을 향해 삿대질하며 손끝이 코끝에 닿을 듯 바짝 들이밀었다.
“그리고 네가 쓴 돈 다 오빠가 번 돈 아니야? 무슨 낯짝으로 네가 산 거라고 우기는 건데? 돌려받겠다고? 하, 어이가 없네!”
이시연은 조용히 비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표정은 냉담했지만 여전히 눈길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너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강이준과 만나는 동안 난 단 한 푼도 받은 적 없어. 오히려 내가 5년 동안 강이준을 위해 일했어도 보수는 단 한 푼도 받지 않았지. 그러니까, 누가 누구에게 빚을 졌는지 이참에 확실히 알아둬.”
이시연의 목소리는 맑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묵직한 기개와 절개가 담겨 있었다.
마치 험준한 절벽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처럼 강직한 분위기를 풍기며 주변을 압도했다.
강이서는 그런 그녀의 당당한 모습에 더욱 불쾌해졌다.
눈앞에 펼쳐진 이시연의 차분하고도 아름다운 얼굴이 그녀의 속을 뒤틀리게 했다.
그 순간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강이준이 들어왔다.
그는 문턱에 서서 방금 전의 대화를 모두 들은 듯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강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강이준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오빠, 얘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 들었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강이준은 이시연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하백산에서 그녀가 그들의 인연을 다시 빌었음을 알고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던 터였다.
어제는 마지막으로 그녀와 통화할 때조차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
이시연도 그의 진심을 이해할 줄 알았건만 오늘 그녀의 말은 점점 선을 넘는 듯했다.
이제는 돈 이야기까지 꺼내다니.
강이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지며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눈을 감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고 차분하게 말했다.
“시연아, 오늘 너를 부른 건 단지 프로젝트 얘기 때문만은 아니야. 우리 사이 문제도 제대로 얘기해 보려고 불렀어. 며칠 동안 소란을 피운 건 내가 먼저 다가가길 바란 거겠지. 이제 알겠으니까, 그만하면 안 되겠니?”
이시연은 천천히 소파에 앉으며 피식 웃었다.
“난 또 밀린 급여라도 주겠다는 얘기인 줄 알았네.”
그 말 한마디에 강이준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가 원하는 게 그 팔찌를 돌려받는 거라면 내가 가져올게. 그러니까 제발 좀 그만해.”
강이서는 깜짝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오빠, 지금 무슨 소리야? 그걸 어떻게 다시 가져와?”
강이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강이서를 흘겨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시연은 여전히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 웃음에는 전혀 온기가 없었다.
“더러워진 건 필요 없어. 쓰레기통에 버린 쓰레기를 주워 오는 습관이 없거든.”
그 말에 강이준은 더 이상 억누르려던 감정을 참지 못하고 눈빛이 몹시 어두워졌다.
어제 그는 투자자들이 왜 이시연을 고집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이시연이 이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었기에 그녀를 남기는 것이 가장 편하고 빠른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이시연을 남기지 않고도 프로젝트를 진행할 방법은 있었다.
강이준은 이미 업계에서 꽤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쌓아둔 인맥도 적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다른 감독을 내세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강이준이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이시연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이시연에게 아직 문을 열어두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고집을 피우며 그가 내민 손길을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이시연.”
강이준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적당히 해라.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내가 이렇게까지 기다려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네 태도를 바꿔.”
그의 말은 경고였다. 그녀가 하백산에 다녀왔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이시연이 아직도 그와의 인연을 원한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이시연이 그와 함께하고 싶다면 최소한의 정성이라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시연은 미소를 거두고 강이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때 자신이 알던 그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강이준은 이제 그녀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차분히 물었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야?”
강이준은 이 말을 듣고 자신의 경고가 효과를 발휘했다고 생각했다.
‘역시 시연이는 내가 정말 떠나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거군.’
강이준과 이시연은 모두 고아였다. 하지만 강이준은 부모님을 여의었어도 친척들이 곁에 있었고 이제는 장아라까지 귀국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시연은 달랐다. 그녀에게는 의지할 친척조차 없었다. 만약 그마저 그녀 곁을 떠난다면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강이준은 그녀의 처지를 떠올리며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사랑했던 여자인데 이렇게 몰아붙이는 게 과연 맞는 걸까.
그래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지금 서 대표한테 연락해. 다시 나한테 돌아온다고 말해. 영화 투자자들이 프로젝트 진행을 재촉하고 있어. 네가 순순히 따른다면 내가 오늘 바로 너를 데리고 가서 투자자들 만나게 해줄게. 프로젝트는 네가 전적으로 맡는 거야.”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이시연의 얼굴에는 감동의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입가에 서늘한 웃음이 서서히 번졌다.
“강이준, 너 투자자에게 연락해 봤어? 내가 없어도 그쪽이 여전히 너와 협력하고 싶어 할까?”
그녀의 말에 강이준은 순간 멈칫했다. 눈빛에는 짜증이 어리며 그녀가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본 듯한 불쾌감이 스쳤다.
그의 이런 모습이 이시연에게는 오히려 우스워 보였다.
이시연은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고 입가에 서린 냉소가 더욱 짙어졌다.
강이준 역시 한층 냉랭해진 눈빛으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시연아, 너 똑똑한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 이 일에선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그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의 말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경멸이 섞여 있었다.
“그쪽에서 너와 협력하겠다는 건 네가 내 사람이기 때문이야.”
이시연은 그의 말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내가 직접 성사시킨 거야. 너와는 아무 상관 없어.”
그녀는 필요에 따라 머리를 숙이는 법을 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원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네가 꼭 가져가야 한다면, 그래. 그냥 너에게 줄게. 우리의 인연을 끝맺는 이별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
강이준은 순간 멍해졌다. 그녀의 첫 번째 말에 놀란 건지 아니면 두 번째 말에 충격받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표정을 읽고는 다시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하나 성사시켰으면 두 번째, 세 번째도 성사시킬 수 있어.”
“내가 네 덕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지켜봐. 너 없이도 내가 얼마나 잘 사는지.”
강이준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화가 나면서도 어쩐지 비웃음이 나왔다.
“끝까지 가보고 나서야 후회할 작정이야?”
그는 이를 악물고 비꼬듯 말했다.
“솔직히 난 네 이런 고집스러운 면이 마음에 들 때도 있어. 다만 지금 네가 그걸 제대로 쓰고 있질 않아서 문제야.”
그의 말에 이시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 프로젝트는 솔직히 그녀도 정말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분명 더는 강이준과 얽히지 않겠다고 말했음에도 오늘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강이준이 배우에서 제작자로 전환하려는 상황에서 이 프로젝트는 그에게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결코 쉽게 놓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가 그녀에게 이 프로젝트를 넘기지 않는 결과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더 이상 대화가 의미 없다고 느낀 이시연은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의연하게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그냥 가게 두면 안 돼!”
강이서가 크게 소리치며 그녀를 막아섰다.
이시연은 자신을 가로막은 강이서를 담담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제대로 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고함치는 강이서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예절 선생님과 유명 예술가들이 가르친 교육은 다 헛수고였나 보네.’
강이준 역시 그런 동생의 모습에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하지만 강이서는 강이준과 이시연의 반응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 여전히 소리를 질러댔다.
“오빠! 오늘 내가 온 이유는 저 여자의 가식적인 가면을 벗겨내기 위해서야! 오빠는 저 여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