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웩...”
임다은이 몸을 돌려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변기 앞에 주저앉아 토했다.
“누나,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저... 저 놀라게 하지 마세요. 누나 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의사 불러올게요.”
처음 보는 임다은의 모습에 김현호는 겁에 질린 듯 얼굴마저 창백해지며 목소리를 떨었다.
그는 말하며 비틀거리며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임다은이 토하며 죽을 듯 살 듯 하는 모습을 보니 이미 죽은 듯이 고요했던 마음에 한 줄기의 파문이 일었다.
몇 년 전, 그녀가 꼬물이를 임신했을 때도 이렇게 토했던 기억이 났다.
다만 그때는 경험이 없었고, 그녀가 애써 사실을 숨긴 채 말하지 않아서 눈치채지 못했다.
“임다은, 우리 아이 기억나?”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투는 나지막하고 힘이 없었고 눈빛도 쥐 죽은 듯 고요했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배승호, 너 또 무슨 생각이야?”
토하는 사이 임다은이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며 한탄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마치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역시... 임다은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마음속에 있던 일말의 기대마저 꺼져버린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9년이야. 가끔 꼬물이 꿈을 꿔. 너무 활발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어. 네 아이기도 한데 애초에 어떻게 그렇게 모질게 굴 수 있었어? 네 뱃속의 아이도 자기 엄마가 사실을 독사 같은 여자라는 걸 알면 너한테 오고 싶지 않을 것 같지 않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쉰 목소리였지만 어두웠던 임다은의 눈빛은 충격으로 물들며 의식적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임다은, 이 아이는 너한테 온 걸 후회할 거야. 어쩌면 다시 하늘로 올라가 작은 천사가 될지도 모르지. 그리고 태어난다고 해도 애는 너를 미워할 것이고, 너를 엄마로 인정하지 않을...”
임다은이 충격받은 틈을 타 나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며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저주를 퍼부었다.
심지어 몸부림치며 일어나 달려들어 그녀를 쓰러뜨리고, 김현호와의 아이를 내 딸처럼 핏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죄가 없었으니 부모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난 도저히 이 울분을 삼킬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독한 말을 하며 임다은과 김현호를 저주하며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지 못했으면 기도했다.
“닥쳐, 배승호! 왜 이렇게 악독해진 거야? 예전의 당신은 얼마나 착했는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인데 어떻게 그런 악랄한 저주를 퍼부을 수 있어?”
임다은이 강하게 버티고 일어서며 배를 움켜쥐고 내 앞으로 달려들어 삿대질하며 나를 질책했다.
“내가 저주한 건 애가 아니라 너와 김현호야. 너희들은 영원히 행복해질 생각하지 마. 왜? 뱀처럼 사악한 여자가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자애로운 엄마가 되고 싶은 거야? 그럼 내 딸은? 내 딸은 세상 한 번 볼 기회도 없이 하수구에 핏물로 변해서 떨어졌어. 너도 친엄마인데 정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거야?”
나는 임다은의 찢어질 듯한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모두 그녀에 대한 비난과 성토였다.
사실 나는 마음속으로 아무리 저주를 퍼부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뱃속의 아이를 무사히 낳을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이미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고 엄마 아빠와 꼬물이처럼 먼지로 변했다.
어쩌면 남은 세 식구는 우리 부녀의 묘를 밟으며 제멋대로 웃고 즐길지도 몰랐다.
나는 그런 광경을 보기 싫어 최선을 다해 그녀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려고 했다.
물론 그녀에게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나... 애초에 나도... 네 아이잖아...”
내 눈빛이 분노와 넘치는 슬픔에 차 있어서 그런지 임다은의 차가운 눈빛에는 결국 죄책감이 비쳤다.
그녀는 입을 열어 설명하며 내 탓으로 돌리려고 했지만 끝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목적을 달성하자 마음속에 약간의 쾌감이 스쳐 갔다. 나는 고개를 들어 차가운 시선으로 임다은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너는 다른 남자의 아이까지 임신했는데 계속 매달리고 있으니 정말 너 자신이 천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아니면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이 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막 미칠 것 같아서 그래?”
“나는... 너... 배승호, 이 개자식!”
내 눈에서 비아냥거림을 엿본 임다은이 미친 듯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말을 마친 임다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땅에 쓰러졌다.
의사를 데리고 온 김현호가 마침 이 광경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누나! 버텨야 해요! 의사 왔어요! 의사도 왔다고요!”
김현호가 얼른 달려들어 임다은을 안아 들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의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어이가 없다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됐어요. 소리 지르지 마시고 얼른 진료실로 안내하세요.”
김현호는 그제야 깨달은 듯 임다은을 안고 진료실을 향해 질주했다.
김현호는 곧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아까의 당황한 기색은 전혀 없이 기세등등한 모습이 역력했다.
“누나가 기절한 것은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임신일 줄은 몰랐죠? 누나가 만지게도 못하고 나사서 다른 여자를 취할 용기도 없으니 이제 여자는 어떤 느낌인지 전부 다 잊었죠? 알려드릴게요. 누나는 관계할 때 피임하는 걸 싫어해요. 임신하면 그대로 아이를 낳아서 지분도 준다고 했어요.”
김현호는 병상 앞 의자에 앉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는데 입꼬리가 하늘로 치켜 올라갈 듯했다.
김현호는 스스로 타격이 세다고 생각하는 말을 골라 내 가슴을 찌르려고 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마음속에는 그저 잔잔한 통증만이 느껴졌을 뿐이다.
어쩌면 임신하면 낳겠다는 말이었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이 세상을 밟아보지 못한 내 딸을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다은이한테 남자가 너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가 젊고 잘생겼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임다은의 신분으로 원하는 남자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어. 왜 다은이가 널 위해 정절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 말고도 연상, 연하 무수히 많은 타입의 남자가 있어. 내가 봤던 남자만 해도 몇인데, 누구 아이일지 어떻게 알아?”
김현호를 올려다보는 나이 시선과 말투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하지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예리한 칼처럼 김현호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도려냈다.
그는 갑자기 멍해졌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놀라움과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믿기 싫지만 자신을 설득할 수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한 말 중 틀린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임다은의 신분으로 어떤 남자든지 그녀가 원하면 오고 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현호는 왜 자신이 임다은에게 유일한 남자라고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임다은은 사실 그렇게 방탕하지는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김현호 하나만을 총애했다.
그런데도 나는 사실과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내 추측대로라면 김현호가 임다은에게 내가 쓰러진 건 그저 감기에 걸려 열이 났기 때문이라고 알려줘서 그녀가 나를 유난 떤다고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나는 단지 같은 계략과 수단으로 그 사람을 다스릴 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거짓말이에요!”
순간 멘탈이 흔들린 김현호는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김현호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둘러 내 얼굴을 내려치려고 할 때,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