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써 자제했지만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이혼 얘기를 한 게 후회되기까지 했고, 이전에도 수없이 그랬듯이 이혼 합의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수천 개의 바늘이 머리를 찌르는 듯 극심한 통증이 밀려와 두개골 전체가 산산조각 날 것 같았다.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숨을 크게 몰아쉬며 최대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통증은 가시지 않았고 어느새 손발이 차가워지며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마침내 통증이 가라앉았다.
나는 손에 든 이혼 합의서에 주 저없이 사인한 다음 간호사에게 건네줬고 이걸 임다은의 변호사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꼬박 1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헌신했으나 임다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3개월도 남지 않은 지금, 그녀의 마음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 싶다. 나중에 죽게 되더라도 내가 이번 생을 헛되이 산 것을 후회하지 않게 가능한 세상의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몸속 깊이 느껴보고 싶었다.
생각을 정리한 후 곧바로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나 병원을 나왔다. 곧이어 바로 공항으로 가서 남하시로 가는 가장 가까운 시간대의 티켓을 샀다.
나중에 사업 때문에 북하시로 옮기게 됐지만 배씨 가문의 본거지는 남하시다.
걱정 없는 어린 시절과 가장 활기 넘치는 10대를 보낸 그곳은 내 삶의 시작이자 곧 끝이 될 종점이다.
임다은이 전화를 걸어온 그때 나는 이미 호텔을 잡은 상태였다.
“배승호. 너 지금 어디야? 나 배 아프니까 당장 와.”
핸드폰 속 임다은의 목소리는 이를 악물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로 고통스럽게 들렸다.
창백한 얼굴로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가엾은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이 아파서 눈시울을 붉히며 달려가 온찜질을 해주기에 바빴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마음이 너무 잔잔하여 그 어떤 파도로 일렁이지 않았다.
지금 임다은이 겪는 고통은 내가 수년간 견뎌온 정신적, 육체적인 고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말할 가치도 없는 이 고통마저도 그녀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김현호를 만난 후로 임다은은 성적 욕구를 억제하지 못했다. 자제력을 완전히 잃은 채 생리 중에도 거리낌 없이 김현호와 성관계를 가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행동은 병의 근원으로 자리 잡아 때때로 경련과 복통을 일으켰다.
북하시의 가장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조차 속수무책일 정도였으니 얼마나 심각한지는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아파서 침대에서 끙끙 앓고 있는 임다은을 볼 때마다 너무 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워 가슴이 찢겨질 듯 아팠다.
그래서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수소문한 끝에 외딴 마을에 있는 용한 한의사를 찾아냈다.
한의사는 연세가 많았는데 아무리 높은 금액을 불러도 진찰을 꺼려했다.
어쩔 수 없이 밤새 마을로 달려가 의관 앞에서 3일 동안 버티며 쉬지 않고 애원했다. 마침내 나의 정성에 감동받은 한의사는 침술 비법을 전수해 줬고 그 후로 임다은이 아플 때마다 침을 놓아 통증을 완화했다.
그때는 임다은이 유일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비참하지만 그 미소에 나는 하루를 버텼고 숨 막히는 결혼 생활 속의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나 지금 북하에 없으니까 못가. 김현호한테 연락해.”
“그리고 이혼 합의서는 사인해서 변호사한테 보냈으니까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마.”
지금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겠지만 내 추측이 맞다면 불과 10분 전까지 김현호와 사랑을 나눴을 것이다.
체념을 한 건지, 아니면 복수하고픈 마음인지 이상하리만큼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차가운 목소리로 담담하게 답했다.
“나 아프다고. 정말 상관없어?”
“배승호. 너 진짜 후회하게 될 거야.”
이를 악문 채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임다은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고스란히 들려왔다.
하지만 곧이어 전화가 끊겼다.
나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웠지만 마음속은 걷잡을 수 없이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10년 동안 목숨 걸고 사랑했던 여자를 하루아침에 완전히 포기한다는 건 역시나 불가능한 일이다.
내 삶은 이미 카운트다운에 들어갔기에 지금 당장 마음 약해져서 달려간다 한들 임다은을 지켜줄 수 있는 시간은 3개월뿐이다.
물론 김현호에게 침술과 온찜질 하는 방법을 알려줘도 된다.
김현호는 돈 때문이라도 임다은은 잘 보살펴 주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임다은이 죽을 만큼 아픈 복통을 겪을 때마다 나를 그리워하고 그동안 소중히 여기지 못한 걸 후회했으면 좋겠다.
임다은과 통화를 마친 후 결국 밤잠을 설쳤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침은 빨리 찾아왔다.
나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자마자 샤워했다. 어젯밤 미리 고른 정장으로 갈아입고 최대한 상쾌한 기분을 느끼려고 애썼다.
오늘은 배씨 가문 본가를 찾아갈 계획이다.
몇 년 전 한성 그룹이 철저히 무너진 후 빚을 갚기 위해 본가를 팔아넘겼지만 결국 그곳은 내가 자란 곳이기에 그리운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눈앞에 임다은이 나타났다.
캐주얼한 차림인데도 긴 다리와 얇은 허리가 매우 돋보였다.
밤새도록 잠을 못 잤는지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와 있었고 유난히 안색이 창백했다.
“왜 왔어?”
이곳에서 임다은을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나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배승호, 너 이제 막 나간다는 거지?”
“내가 어젯밤에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죽을뻔했다고.”
“병원에 혼자 두고 나온 게 그렇게 기분 나빴어? 고작 감기 따위로 왜 이렇게 오바해?”
임다은은 나를 보자마자 분노를 터뜨릴 곳을 찾은 것 같았다.
매섭게 째려보는 그 눈빛은 마치 짐승이 먹잇감을 본 것마냥 산채로 잡아먹을 듯 날카로웠다.
예전이었다면 이미 임다은을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대로 조용히 죽고 싶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 묵혀둔 서운함이 끝내 머리를 비집고 나왔다.
많은 고민 끝에 나는 임다은에게 뇌종양 말기 사실을 알리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한때는 부부였기에 그녀에게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임다은이 아주 조금의 감정이라도 남아있다면 삶을 다한 마지막 순간이 너무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은 채 사라진다면 얼마나 비참할까.
“임다은. 실은 감기 때문에 쓰러진 게 아니라...”
나는 임다은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나, 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병원에 남아서 보살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제 탓이니까 너무 형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형이 침놓는 방법을 여러 번 알려줬는데 제가 멍청해서 아직도 익히지 못했어요. 난 바보야...”
김현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촉촉한 눈망울로 임다은을 보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순직한 척 연기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니 역겨움이 밀려와 당장이라도 가면을 벗기고 싶었지만 나와 달리 임다은은 언제나 그렇듯 금세 눈빛이 부드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