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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박씨 가문으로 입주

박선재는 수지와 인사를 나눈 후 유정숙과 몇 마디 더 얘기를 나눴다. 모든 교대를 마치고 나서야 유정숙은 수지와 임수빈을 떠나보냈다. 어르신은 두 사람을 요양원 문 앞까지 배웅하면서 눈물을 머금은 채 수지의 손을 꼭 잡았다. “박씨 가문에서 지내는 동안 서진이랑 잘 지내봐.” 유정숙은 임수빈이 옆에서 다 듣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서진이 걔 약혼녀가 있다고 하던데 너희 할아버지 말로는 약혼녀랑 딱히 감정이 없대. 요즘은 결혼해도 툭하면 이혼하는 세월인데 하물며 약혼은 언제든 무를 수 있지.” “할머니...” 이때 수지가 어르신의 말을 자르며 묵묵히 옆에 있는 임수빈을 쳐다봤다. 임수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녀는 바로 눈치챘다. 이 남자를 처음 본 순간 박서진의 수행비서일 거란 짐작이 들었다. 이런 신분의 사람들은 성격이 꼼꼼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 알았어. 이것 하나만 약속해. 서진의 마음 단단히 사로잡아서 하윤아랑 강현우한테 제대로 복수해줘.” “얼른 들어가세요! 요양원에서 간호사님 말씀 잘 듣고 식사도 제때 챙겨 드셔야 해요. 운동도 꾸준히 하셔야 하고요. 그럼 다음에 또 뵈러 올게요.” 수지는 할머니를 꼭 안아드리고 진미영에게 신신당부한 후에야 임수빈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이 요양원을 나선 후 수지가 부른 검은색 벤츠 지바겐이 어느덧 도착했다. “수빈 씨, 저희 할머니가 하신 말씀은 새겨들으실 필요 없어요. 박씨 저택에 가서 지내는 건 사양할게요. 다만 할머니 쪽은 수빈 씨가 대신 잘 둘러대서 넘어가 주시길 부탁드려요.” “수지 씨, 그럴 생각이시라면 직접 가서 어르신께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고작 비서일 뿐이니 어르신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어요.” 임수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오늘 박선재는 그에게 수지를 무조건 저택으로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렸기에 이를 거역한다면 비서직에서도 잘리는 수가 있다. 수지는 미간을 찌푸렸고 이때 임수빈이 차 문을 열었다. “타세요, 수지 씨.” “할머님께서 수지 씨를 진심으로 아껴주시는 것 같더군요. 수지 씨가 약속을 저버리면 할머님도 분명 상심이 크실 겁니다.” 할머니를 언급하자 수지는 잠시 고민하더니 끝내 방금 부른 차를 보내고 임수빈의 차에 올라탔다. ... 한 시간 후, 임수빈은 수지를 데리고 대성 별장에 도착했다. 박선재는 이미 집사와 도우미를 시켜서 손님방을 깨끗이 청소해두었는데 그곳이 바로 박서진의 침실 옆방이었다. 유정숙은 그에게 손녀딸과 박서진의 결혼을 제안했지만 박선재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박서진이 성수에 약혼녀가 있으니 망설여질 따름이었다. 그래도 그 약혼녀를 썩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일단 절충하여 수지를 집까지 데려왔다. 두 아이가 서로 호감이 생기면 자연스레 이어질 것이고 만약 호감이 없다면 박선재도 유정숙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된다. “수지야, 여기가 네 방이야. 마음에 안 들거나 바꾸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할아버지가 다 고쳐줄게.” 박선재는 허허 웃으며 수지의 손을 잡고 방을 둘러보았다. 수지는 영상으로 볼 때보다 더 작고 귀여운 데다가 다소곳하기까지 했다. 한편 수지는 하씨 가문에서 너무나도 평범한 방에서 지냈다. 하동국과 김은경은 그녀에게 뭐든 남들과 비교해선 안 된다고, 부잣집 딸이라고 교태를 부려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으니까. 결국 그녀는 하씨 가문에서 넉넉지 못한 조건으로 지내왔다. 다행히 유정숙이 정성껏 보살펴서 하동국 부부한테서 못 받은 것들을 할머니가 몰래 그녀에게 베풀곤 했었다. 그러던 지금 대성 별장에서 당분간 지내게 되었으니 수지는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싫증을 낼 리가 있을까. “할아버지, 너무 마음에 들어요.” 수지는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너 아무것도 안 챙겨왔네? 설마 하씨 가문에서 못 챙겨가게 한 거야?” 수지는 빈손으로 왔고 박선재도 사전에 유정숙한테서 하동국 부부의 인성을 전해 들었으니 이 아이가 더욱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수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팩 말곤 아무것도 챙겨오지 않았으니까. 또한 백팩에도 귀중한 물품은 없고 고작 아이패드랑 설계도만 몇 장 들어있었다. 아이패드는 전에 하윤아가 가방에서 떨어트리고 무참하게 짓밟아버려서 고장이 났는데 미처 수리하러 가지 못했다. 설계도도 그때 바닥에 떨어진 걸 다시 주워서 가방에 넣어둔 것이다. “이따가 서진이 오거든 함께 가서 옷이라도 몇 벌 사 입어.” “말씀만이라도 고마워요, 할아버지.” 수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박선재의 호의를 거절했다. “인터넷으로 이미 구매했어요. 내일이면 도착할 거예요.” “그래? 그러려무나.” “일단 좀 쉬어. 이따가 내려와서 저녁 먹으면 돼.” 박선재는 너무 강요하지 않았다. 여자아이인지라 쑥스러움도 많고 금방 입주한 집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네, 고마워요 할아버지.” 그가 아래층으로 내려간 후 수지는 가방을 벗고 문을 닫고서 방 안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CCTV가 설치되지 않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도 안심하고 세수하러 들어갔다. 세안을 마치고 침대 맡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더니 제자 이다은한테서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사부님, 성수 박씨 가문에서 거금을 들여서 사부님 소식을 캐고 있어요. 집안에 환자가 있나 봐요. 사부님이 치료해주시길 바라는 것 같아요.] 수지는 박씨 가문이라는 문구에 곧바로 박선재의 집안이 떠올랐다. 그녀는 휴대폰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다은에게 답장을 보냈다. [수락해.] 이다은의 답장이 곧바로 도착했다. [네, 사부님.] 수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더는 이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다은이 알아서 약속 시간과 장소, 인원까지 다 안배할 테니 그때 가서 환자 치료만 하면 그만이니까. ... 그 시각 오성 해원 그룹 지사. 임수빈은 박서진에게 수지를 만난 뒤 일어난 모든 일을 보고했고 유정숙이 수지에게 했던 말까지 낱낱이 전해드렸다. 보고를 다 들은 박서진은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원래 수지가 비호감이었는데 이제 증오가 더 깊어진 듯싶었다. 이 여자는 할머니와 짜고 쳐서 그를 이용하려고 들 뿐만 아니라 이젠 갖은 계략으로 박씨 저택까지 들어왔으니,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어르신께서 수지 씨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방도 대표님 침실 바로 옆방으로 해주셨어요.” 임수빈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일단 가까이에서 대표님과 빨리 친해지게 하려는 듯싶어요...” “임 비서, 할아버지께 전해드려. 나 요즘 줄곧 출장 나가야 하니까 대성 별장에 안 돌아갈 거야.” 박서진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바로 5분 전에 도착한 메일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얼른 메일을 열어보았다. [박서진 씨, 제니 씨가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장소는 보경시 청주 사립병원이고 시간은 7월 20일 오전 10시입니다.] 순간 박서진은 두 눈을 반짝이며 임수빈에게 말했다. “7월 20일 일정은 싹 다 빼놔. 그날 할아버지 모시고 보경시로 갈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는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실은 오성에 닥터 제니가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야 할아버지를 모시고 이리로 온 것이다. 어느덧 제니 측에서 연락이 왔으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병 보이러 가면 수지와의 만남도 피면할 수 있고 너무 잘된 일인 듯싶었다. “임 비서, 대성 별장에 가서 내 짐 정리를 마치고 할아버지께도 말씀드려. 내일 아침에 바로 나랑 함께 보경시로 가야 한다고 말이야.” 박서진은 미리 할아버지를 모시고 보경시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해원 그룹은 보경시를 비롯한 전 세계에 지사를 두고 있다. 하루빨리 도착한 후 할아버지를 정착시키고 지사로 가서 시찰할 수도 있고 나름 좋은 계획이었다. 허영심 많고 돈만 밝히는 유정숙 할머니의 손녀로 말할 것 같으면 당분간 대성 별장에 홀로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다. 박서진도 없고 박선재까지 집을 비우게 된다면 그녀 또한 이들에게 잘 보일 기회가 차려지지 않을 것이다. “네, 대표님.” 임수빈이 깍듯하게 대답했다. “그럼 오늘 밤엔 호텔에서 묵으시겠습니까?” “응, 프레임 호텔로 예약해.” “네, 알겠습니다.” 임수빈은 사무실을 나선 후 다시 대성 별장으로 향했다. 그 시각 대성 별장 안. 수지는 박선재에게 이끌려 다니면서 별장 환경과 주변 노선까지 한번 숙지하게 되었다. “수지야, 앞으론 마음 놓고 여기서 지내. 하씨 가문의 일은 너희 할머니한테 다 전해 들었어. 그 집에서 그렇게 하는 건 확실히 옳지 않아.” “내가 서진이 시켜서 무조건 너희 부모님 찾아줄게.” “고마워요, 할아버지. 여기까지 찾아와서 너무 번거롭게 굴었네요. 며칠 뒤에 개학이니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면 돼요.” 수지는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 하동국과 김은경은 그녀에게 각박하게 굴면서 대학교에 입학한 첫해부터 기숙사에서 지내게 했다. 그럼에도 수혈이 필요할 땐 당장 병원에 달려와서 수혈하라고 요구했다... 유정숙은 수지가 기숙사에서 지내는 걸 반대했지만 그녀가 겨우 설득했다. 학교에서 지내면 독립에도 도움이 되고 더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다면서 주말마다 집에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할머니를 다독였다. 또한 매일 유정숙과 영상통화를 하면서 겨우 기숙사에서 지낼 수 있게 허락을 받은 것이다. “할아버지도 우리 할머니처럼 저를 아껴주시는 걸 알아요. 이 은혜를 꼭 잊지 않을게요!” 수지가 다소곳하게 말했다. 그녀는 어르신들이 어떤 손녀를 좋아하는지 잘 알기에 그들 앞에선 최대한 착하게, 자신을 믿어줄 수 있게 행동하고 있다. 비록 여자이지만 수지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약하거나 누구의 보살핌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다. 물론 박선재도 아주 좋은 분이지만 박씨 저택에서 지내는 건 어디까지나 남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 아닐까? 하동국과 김은경의 밑에서도 어언간 20년을 얹혀살았으니 유정숙의 부탁만 아니었어도 수지는 더 이상 그 누구에게 얹혀살 마음이 없었다. “어르신, 도련님 전화입니다.” 이때 집사가 휴대폰을 들고 오며 미안한 표정으로 수지와 박선재의 대화를 끊었다. “아주 긴요한 일로 어르신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리 줘.” 박선재는 수지 앞에서 대놓고 전화를 받았다. “그래, 말해.” “할아버지, 저 오늘 밤에 못 돌아갈 것 같아요. 집사님더러 짐 정리하라고 하세요. 내일 저랑 함께 보경시로 여행을 다녀오셔야 해요.” “뭐?” 박선재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늘 안 돌아온다고? 너희 양 할머니 손녀가 지금 우리 집에 와 있는 걸 알아 몰라? 돌아와서 인사를 나누지도 못할망정 내일 바로 나랑 함께 여행을 간다고?” “서진이 너 인간 됨됨이가 엉망이구나. 할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쳤어?” “할아버지, 지금은 일단 자세한 것까지 말씀드릴 수 없고요. 내일 아침 임 비서 보낼 테니 우리 차에서 얘기해요.” 박선재는 울화가 치밀어서 뭐라 더 말하려 했는데 박서진이 대뜸 전화를 꺼버렸다. 그가 비록 스피커폰으로 전환하진 않았지만 옆에 있던 수지는 대화 내용을 고스란히 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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