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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하씨 가문에서 그녀를 아껴주는 단 한 분

수지는 차갑게 말을 내뱉고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후 홀가분하게 자리를 떠났다. 이를 본 하윤아가 입술을 꼭 깨물고 난감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엄마, 아빠, 쟤 좀 봐요. 지금 저거 무슨 뜻이에요? 우리 집이랑 완전히 등지겠다는 거예요?” “엄마, 아빠가 20년이나 키워줬고 내 인생을 20년이나 훔쳐 갔으면서 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내뱉는 거냐고요?” “꼭 마치 우리 집에서 쟤한테 빚진 것처럼 말하잖아요.” 한편 김은경은 친딸 하윤아가 수지에게 적나라하게 까발린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그것도 강현우 앞에서 큰 망신을 당했으니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결국 수지의 뒷모습을 향해 포악하게 쏘아붙였다. “배은망덕한 년, 여태껏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려!” “오빠, 이건 오해예요.” 하윤아가 조심스럽게 강현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이제 막 하씨 가문에 돌아왔고 가족들과 첫인사를 나누던 날 강현우에게 첫눈에 반했다. 다만 수지와 강현우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란 걸 알게 되고 몹시 불안해졌다. 강현우는 수지를 좋아하기에 그녀와의 혼약을 선뜻 무를 수가 없었다. 그제야 하윤아도 안미진을 찾아서 이런 자작극을 벌인 것이다. 수지가 하씨 가문을 떠날 때 ‘도둑’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씌워서 부모 없는 자식은 뼛속부터 못돼먹었다는 걸 강현우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근데 수지가 제 방에 CCTV를 설치했을 줄이야. 게다가 문 앞에도 한 대 더 설치했으니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강현우가 실망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하윤아가 하씨 가문의 진짜 딸이고 또한 그동안 밖에서 모진 수모를 겪었으니 안정감도 없고 본인 인생을 20년이나 대체한 수지가 질투 나서 이런 반격을 했을 거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괜찮아. 오해라면 다행이지. 수지가 아무 물건도 안 훔쳤으면 된 거야.”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하윤아를 위로했다. “윤아야, 아줌마, 아저씨, 저는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하윤아가 뭐라 더 말하려 할 때 김은경이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강현우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현우야. 얼른 가봐! 저녁에 잊지 말고 밥 먹으러 와.” “네.” 대답을 마친 강현우는 곧장 하씨 저택을 떠났다. ... 그 집에서 나온 강현우는 운전하다가 길옆에서 두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걸어가고 있는 수지를 발견했다. 그녀는 날씬한 몸매에 완벽한 비율을 지녔다. 인형처럼 예쁜 얼굴은 생얼일 때도 눈부시게 아름다우니 풀 메이크업으로 장착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전에 강현우의 엄마 주현정이 말하길 수지는 하동국과 김은경을 닮은 구석이 없다고 했다. 두 사람의 장점을 다 합쳐도 그녀의 또렷하고 예쁘장한 외모의 절반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다. 그때 강현우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좋은 유전만 물려받아서 더 훌륭하게 변한 것 아니겠냐고, 더 예쁘고 뛰어나면 그만이지 않냐고 반박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수지는 정말 하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었다... 강현우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어디 가, 수지야? 내가 데려다줄게.” 그는 수지 옆으로 차를 몰고 와서 차창을 내렸다. 수지는 그를 보더니 담담하게 머리를 내저었다. “됐어.” 그녀는 이제 하씨 가문의 딸이 아니니 강현우와의 혼약도 없는 일이 된다.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함께 커왔다고 해도 수지는 굳이 딴 여자랑 한 남자를 뺏을 마음이 없다. “아무리 신분이 밝혀졌다고 해도 나랑 등질 필요까진 없잖아?” 강현우는 살짝 서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동안 우리가 함께 자라온 추억도 다 부질없는 거야? 얼른 타. 여기 택시 잡기 힘들어. 내가 데려다줄게.” 수지는 잠시 고민했다. 여긴 확실히 택시를 잡기 힘들어서 큰길까지 걸어 나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녀는 마침내 차 문을 열고 안에 올라탔다. “택시 잡는 곳까지 실어주면 돼.” “어디 가는데? 그냥 바래다줄게.” “그럴 필요 없어. 넌 이제 하윤아 약혼자이니 나랑 피해 다니는 게 맞아.” 수지는 담담한 어투로 강현우의 호의를 거절했다. 이에 강현우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다만 씁쓸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화가 더 치밀었다. 그는 묵묵히 차를 몰고 택시 타는 곳까지 도착한 후 브레이크를 힘껏 밟으며 차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싸늘한 얼굴로 앞길만 바라봤다. “땡큐.” 수지는 차에서 내린 후 카카오페이로 강현우에게 4천 원을 계좌 이체하며 메시지를 남겼다. [차비.] 이어서 휴대폰을 챙겨 넣고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후 택시를 한 대 잡았다. “하늘 요양원으로 가주세요.” ... 30분 후 택시가 하늘 요양원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수지는 요양원 대문을 지키는 경비원과 인사를 나누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할머니 보러 왔구나.” “네.” 들어가는 길에서 간호사와 의사가 그녀를 보더니 반갑게 맞이했다. 수지는 하늘 요양원의 단골이다. 그녀는 하씨 가문 어르신 유정숙을 뵈러 자주 찾아오곤 한다. 오히려 하동국과 김은경은 걸음이 뜸했다. 유정숙의 병실 앞에 도착한 그녀는 안을 살며시 들여다봤다. 유정숙은 한창 창가 자리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피카츄 인형들을 보다가 그중 하나를 들어 올리고 활짝 웃었다. “잡았다, 우리 수지.” “어딜 도망가. 이 할미가 간지럽혀야지.” “간질간질.” 유정숙은 1인 2역으로 수지 역할까지 하면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이를 본 수지는 가슴이 찡해서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사실 유정숙은 전에 이러지 않았다. 어르신은 하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수지를 진심으로 보살펴주시는 분이다. 원래 지극히 정상이었는데 수지가 16살 때 그녀를 구하느라 차에 치이는 바람에 지능이 6살짜리 아이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어린아이로 변해버린 유정숙 때문에 하동국과 김은경은 몹시 귀찮고 짜증이 났다. 아무리 집안에 어르신을 보살펴주는 도우미가 있다고 한들 두 사람은 줄곧 짜증만 늘어났다. 김은경은 유정숙이 툭하면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고 하동국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몇 번 참다가 끝내 하동국과 상의를 마치고 매정하게 하늘 요양원으로 보내버렸다. 이 4년 동안 오직 수지만 어르신을 뵈러 요양원에 자주 찾아왔다. 하동국과 김은경은 처음 몇 번은 그래도 정기적으로 보러 오더니 그 뒤로는 아예 발길이 끊겼다. 심지어 어르신의 치료비마저 부담하지 않으려 했다. 수지를 구하다가 바보가 됐으니 이 돈은 마땅히 수지가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한편 수지는 돈 따위 신경 쓰지 않았고 할머니가 나아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씨 가문은 이 몇 해 동안 수지가 암암리에 도와준 덕에 오성 갑부로 거듭났으니 말이다. 다만 오성은 인제국의 아주 작은 도시일 뿐 성수에서 축에 끼지도 못한다. 수지가 없었다면 하씨 가문은 5년 전 그 위기에서 진작 파산을 당하고 길바닥에 나앉게 됐을 것이다. 아쉽게도 하동국과 김은경은 이 모든 게 수지의 공로란 걸 모르고 본인들이 정말 천재 실력을 지녀서 많은 역경을 물리친 거로 여기고 있다. 수지가 하씨 가문과 완전히 결렬하지 않은 이유 또한 유정숙 때문이다. 그녀가 문 앞에서 한참 바라보자 유정숙도 시선이 느껴졌는지 피카츄 인형을 내려놓고 활짝 웃으며 가까이 달려갔다. “우리 수지 왔네.” “할머니가 맛있는 거 남겨뒀어. 간호사도 몰라. 내가 몰래 숨겨둔 거야.” “얼른 와.” 유정숙은 그녀를 이끌고 신비스럽게 병상 앞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힌 후 침대 밑으로 몸을 쪼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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